RSS 서비스 http://lib.jnue.kr/JNUE 전주교육대학교 도서관 : 최신소장자료 ko 2024-10-01T00:01:01+09:00 Copyright (c) 전주교육대학교 도서관 All right reserved <![CDATA[공공역사를 실천 중입니다]]> 저자 : 이하나 , 출판사 : 푸른역사 , 입수일자 : 2024.09.12 ]]> 이하나 2024-09-12 <![CDATA[규슈, 이런 여행 :지리학자 3인의 규슈 이야기]]> 저자 : 손일, , 출판사 : 푸른길 , 입수일자 : 2024.09.05 ]]> 손일, 2024-09-05 <![CDATA[나도 그 섬에 가고 싶었다 :지리학자 김만규와 걷는 제주길]]> 저자 : 김만규, , 출판사 : 푸른길 , 입수일자 : 2024.09.05 ]]> 김만규, 2024-09-05 <![CDATA[몽골제국 연대기]]> 김호동 2024-09-12 <![CDATA[스토리텔링 청소년 독도 교과서 :독도의 모은 이야기를 가장 쉽고 재미있게 들려주는 대한민국 독도 교양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청소년 권장 도서로 추천한 『스토리텔링 청소년 독도 교과서』의 2판이 2015년 첫 출간 이후 9년 만에 출간되었다. 독도에 흠뻑 빠져 독도를 알리는 데 진심인 현직 교사 이두현은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독도를 사랑하는 여러 선생님과 함께 학교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독도 수업 자료를 개발하고 있다. 최근에 출간한 『색칠하며 떠나는 독도 여행』도 이번 2판의 감수를 맡은 경기도책공작소 독도기반연구회 선생님들과의 협업으로 완성된 독도 학습 자료이다. 늘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가르치지만 청소년들이 독도의 역사, 지리, 환경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독도 교육은 무의미하다. 영토 교육은 영토의 존재 이유, 변화 과정, 가치 등을 알리며 영토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불어넣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배타적 경제수역이나 방공 식별 구역 등 영역의 개념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독도에 가는 길을 설명하면서 시작된다. 지도에 그려진 뱃길 위에는 소요 시간까지 적혀 있고, 배 안에서 독도를 바라보는 느낌이 그대로 전달된다. 실제로 학생들과 함께 독도와 울릉도를 방문하여 함께 보고, 듣고,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써 내려 갔기 때문에 더 생생하고 흥미롭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독도의 위치, 현황, 형성 과정, 기후와 지형, 역사서와 지리서를 근거로 한 역사를 비롯하여, 독도의 바위와 관련된 옛날이야기까지 빼놓지 않고 담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영해를 둘러싼 국가 간 갈등과 국제법, 그리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속셈과 그 문제점까지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독도의 자연환경과 지리, 동식물 등을 현지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과 최신 연구 결과를 통해 흥미롭고 새롭게 소개했고, 자원, 역사, 국제법, 한일 어업 협정 논란 등에 대해서는 지도와 그림을 함께 보여 주며 되도록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과거 역사서의 원문 풀이를 통해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으며, 과거부터 현재까지 독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이들을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독도의 온갖 분야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스토리텔링 청소년 독도 교과서』는 누구나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독도 교양서이자, 독도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담은 독도 교과서이다. 학생들과 함께한 체험 활동을 바탕으로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완성된 새로운 형태의 독도 전문서로서 독도와 관련된 다양한 분야를 모두 융합하여 청소년들이 독도에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고 흥미롭게 다가갈 것이다. 나아가 독도 문제를 이해하고 독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 : 이두현 , 출판사 : 푸른길 , 입수일자 : 2024.09.05 ]]>
이두현 2024-09-05
<![CDATA[역사를 소비하다 :역사와 대중문화]]> 허구화된 역사, 즉 문화적 상품으로서의 과거는
대중의 상상력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역사는 대중문화에 스며들어 있고, 역사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에서 나타난다. 대중문화가 과거성을 이해하고 활용하고 소비하는 방식은 사회가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 아주 잘 설명해주는 모델이며 패러다임이다.

TV 드라마 [정도전],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TV쇼 진품명품], 온라인 게임 ‘문명’, 지자체들의 각종 문화상품 등의 공통점은 "역사"
최근 몇 년 동안 영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에서 역사는 새로운 형태의 로큰롤이나 조경법, 혹은 새로운 요리법이라 불릴 정도로 화제의 중심에 섰다. 대중들은 역사와 관련된 모든 것에 열광한다. 문화사, 유명인 역사학자, 역사 소설, 스타들이 등장하는 역사 영화, TV 역사 드라마, 다큐멘터리와 리얼리티 쇼뿐만 아니라 문화 이벤트와 역사적 사건을 재현한 리인액트먼트까지. 학문과는 거리감이 있는 이런 대중 역사학은 복합적이면서 역동적인 실체로 자리 잡으며 대중들이 과거를 이해하는 모든 방식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역사 관련 대중 서적이 폭증하고 드라마는 날이 다르게 픽션화되고 있으며, 과거사 분쟁도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온라인을 중심으로 대중의 참여가 늘어나는 현상과 맞물려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대중이 역사와 관계를 맺고 상호 작용하며 참여하는 모습을 진지한 연구 대상으로 삼을 필요성이 제기된다.

역사의 사회적 소비에 대한 의미 있고 흥미로운 분석이며, 역사학, 문화이론, 미디어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논의를 담은 책
이 책은 제롬 드 그루트(Jerome de Groot)의 Consuming History: Historians and heritage in contemporary popular culture(2008년)를 번역한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 제롬 드 그루트는 사회가 어떻게 역사를 소비하는지, 그리고 이런 소비를 읽어내는 것이 오늘날 대중문화와 재현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를 살펴본다. 이 책이 분석대상으로 하는 문화적 영역은 방대하다. 컴퓨터 게임에서부터 TV 역사물, ??다빈치 코드?? 같은 베스트셀러 소설에서부터 유전자 계보학까지. 이를 통해 현대 대중문화 속에서 역사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파헤친다.
저자는 ‘문화유산’에 대한 학계의 논쟁 이후 박물관이 어떻게 변화해갔는지, 과학기술이 발전한 뒤 온라인 게임이나 인터넷 계보학 등에서 대중이 역사에 접근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등을 면밀히 검토한다. 저자는 ‘대중’ 역사학과 학계의 역사학 간의 관계에서 갈등적인 측면에 대해 책에서 강조하면서,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의 이론과 실천방식에 대해 중요한 질문들을 던진다.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역사 주체가 있는가? 만약 있다면 그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이며 어떻게 정의되며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역사적 가능성과 경험이 친숙해지고 다양해지는 일은 과거가 소개되는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가? 어떻게, 왜 그리고 언제 사회는 역사를 ‘소비하는가?’ 역사를 하나의 상품으로 보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웹 등 비전문적인 미디어들은 어떻게 문화적 기억을 만들도록 해주는가? 이렇게 허구화된 역사, 즉 문화적 상품으로서의 과거는 대중의 상상력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텔레비전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디지털화, 스트리밍 미디어, 웹2.0 그리고 전문화된 틈새 프로그램 등이 등장하면서 텔레비전은 빠르게 시대에 뒤떨어진 미디어가 됐다. 이런 과학 기술들은 대중의 인식과 역사의 이해를 어떻게 바꿔놓았는가? 이 같은 커뮤니케이션 전달 방식의 진화를 살펴봄으로써 역사가 이해되는 방식을 검토해볼 수 있을까?
이 책은 이런 다양한 질문을 던지려는 노력이며, 또한 지난 15년 동안 영국 등에서 벌어진 대중과 역사의 만남에서 생긴 커다란 변화를 담으려는 시도다.

현대 문화와 지식 형태에 대한 상세하고도 의미 있는 단면도
저자는 오늘날 역사에서의 핵심적인 면을 고려해 이 책을 6개 부로 나누었다. 1부 대중적 역사가, 2부 역사 소비자의 참여권한 확대, 소유 그리고 소비: 아마추어 히스토리, 3부 역사 공연과 연극, 4부 역사와 텔레비전, 5부 문화 장르로서의 ‘역사적인 것들’, 6부 역사 유물과 해석 등이다. 이를 합쳐보면 현대 문화와 지식 형태에 대한 상세하고도 의미 있는 단면도가 된다. 각각의 부는 오늘날의 역사 참여와 역사 소비가 가지는 풍부한 다양함과 복합적인 의미, 서로 겹치는 기호학과 그 빈도 같은 것들을 잘 설명해준다.

이 책은 다양한 분야의 문화 형태와 문화적 행위 속에서 ‘역사를 소비’하는 데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연구한 것이다. 특히 과학기술과 색다른 체험, 그리고 역사기록학적인 논쟁이 역사를 소비하고 이해하고 판매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분석한다.
이 책은 이런 새로운 역사 소비의 형태를 분석해 오늘날의 문화를 이해하고, 대중과 역사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의 의미를 살펴본다. 특히 이 책에서 주목한 부분은 온라인 게임에서부터 계보학자들의 인터넷 활용까지 과학 기술이 역사의 접근에 끼친 영향력이다. 즉, 전문 역사가들이 무시해온 미디어 속에 드러나는 역사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역사학에 ‘가상적 전환(virtual turn)’ 같은 것이 일어났음을 가정한다. 대중이 역사적 감각을 키워온 방법을 살펴보며, 특히 과거라는 것이 어떻게 빠른 시간 안에 상품성을 얻어왔는지 연구한다.
한 사회가 역사를 어떻게 소비하는가 하는 문제는 현대의 대중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며, 재현 자체와 관련된 이슈를 이해하는 데도,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자기이해와 사회적 구성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다. 이 책이 영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연구한 결과물이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와 대중문화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이유이다. 한 사회가 역사를 어떻게 소비하는가 하는 문제는 다양한 종류의 미디어와 사회경제적인 모델을 통해 ‘소비’를 설명함으로써 ‘소비’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질문도 할 수 있게 해준다. 소비 행위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것에 영향을 끼치며, ‘과거’가 사회 속에서 스스로를 어떤 모습으로 드러내느냐를 정의하는 데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역사는 대중문화에 스며들어 있고, 역사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에서 나타난다. 대중문화가 과거성을 이해하고 활용하고 소비하는 방식은 사회가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 아주 잘 설명해주는 모델이며 패러다임이다.∥책 소개 TV 드라마 《정도전》,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TV쇼 진품명품》, 온라인 게임 ‘문명’, 지자체들의 각종 문화상품 등의 공통점은 “역사” 최근 몇 년 동안 영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에서 역사는 새로운 형태의 로큰롤이나 조경법, 혹은 새로운 요리법이라 불릴 정도로 화제의 중심에 섰다. 대중들은 역사와 관련된 모든 것에 열광한다. 문화사, 유명인 역사학자, 역사 소설, 스타들이 등장하는 역사 영화, TV 역사 드라마, 다큐멘터리와 리얼리티 쇼뿐만 아니라 문화 이벤트와 역사적 사건을 재현한 리인액트먼트까지. 학문과는 거리감이 있는 이런 대중 역사학은 복합적이면서 역동적인 실체로 자리 잡으며 대중들이 과거를 이해하는 모든 방식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역사 관련 대중 서적이 폭증하고 드라마는 날이 다르게 픽션화되고 있으며, 과거사 분쟁도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온라인을 중심으로 대중의 참여가 늘어나는 현상과 맞물려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대중이 역사와 관계를 맺고 상호 작용하며 참여하는 모습을 진지한 연구 대상으로 삼을 필요성이 제기된다. 역사의 사회적 소비에 대한 의미 있고 흥미로운 분석이며, 역사학, 문화이론, 미디어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논의를 담은 책 이 책은 제롬 드 그루트(Jerome de Groot)의 Consuming History: Historians and heritage in contemporary popular culture(2008년)를 번역한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 제롬 드 그루트는 사회가 어떻게 역사를 소비하는지, 그리고 이런 소비를 읽어내는 것이 오늘날 대중문화와 재현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를 살펴본다. 이 책이 분석대상으로 하는 문화적 영역은 방대하다. 컴퓨터 게임에서부터 TV 역사물, 『다빈치 코드』 같은 베스트셀러 소설에서부터 유전자 계보학까지. 이를 통해 현대 대중문화 속에서 역사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파헤친다. 저자는 ‘문화유산’에 대한 학계의 논쟁 이후 박물관이 어떻게 변화해갔는지, 과학기술이 발전한 뒤 온라인 게임이나 인터넷 계보학 등에서 대중이 역사에 접근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등을 면밀히 검토한다. 저자는 ‘대중’ 역사학과 학계의 역사학 간의 관계에서 갈등적인 측면에 대해 책에서 강조하면서,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의 이론과 실천방식에 대해 중요한 질문들을 던진다.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역사 주체가 있는가? 만약 있다면 그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이며 어떻게 정의되며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역사적 가능성과 경험이 친숙해지고 다양해지는 일은 과거가 소개되는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가? 어떻게, 왜 그리고 언제 사회는 역사를 ‘소비하는가?’ 역사를 하나의 상품으로 보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웹 등 비전문적인 미디어들은 어떻게 문화적 기억을 만들도록 해주는가? 이렇게 허구화된 역사, 즉 문화적 상품으로서의 과거는 대중의 상상력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텔레비전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디지털화, 스트리밍 미디어, 웹2.0 그리고 전문화된 틈새 프로그램 등이 등장하면서 텔레비전은 빠르게 시대에 뒤떨어진 미디어가 됐다. 이런 과학 기술들은 대중의 인식과 역사의 이해를 어떻게 바꿔놓았는가? 이 같은 커뮤니케이션 전달 방식의 진화를 살펴봄으로써 역사가 이해되는 방식을 검토해볼 수 있을까? 이 책은 이런 다양한 질문을 던지려는 노력이며, 또한 지난 15년 동안 영국 등에서 벌어진 대중과 역사의 만남에서 생긴 커다란 변화를 담으려는 시도다. 현대 문화와 지식 형태에 대한 상세하고도 의미 있는 단면도 저자는 오늘날 역사에서의 핵심적인 면을 고려해 이 책을 6개 부로 나누었다. 1부 대중적 역사가, 2부 역사 소비자의 참여권한 확대, 소유 그리고 소비: 아마추어 히스토리, 3부 역사 공연과 연극, 4부 역사와 텔레비전, 5부 문화 장르로서의 ‘역사적인 것들’, 6부 역사 유물과 해석 등이다. 이를 합쳐보면 현대 문화와 지식 형태에 대한 상세하고도 의미 있는 단면도가 된다. 각각의 부는 오늘날의 역사 참여와 역사 소비가 가지는 풍부한 다양함과 복합적인 의미, 서로 겹치는 기호학과 그 빈도 같은 것들을 잘 설명해준다.∥신간 출간의의 이 책은 다양한 분야의 문화 형태와 문화적 행위 속에서 ‘역사를 소비’하는 데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연구한 것이다. 특히 과학기술과 색다른 체험, 그리고 역사기록학적인 논쟁이 역사를 소비하고 이해하고 판매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분석한다. 이 책은 이런 새로운 역사 소비의 형태를 분석해 오늘날의 문화를 이해하고, 대중과 역사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의 의미를 살펴본다. 특히 이 책에서 주목한 부분은 온라인 게임에서부터 계보학자들의 인터넷 활용까지 과학 기술이 역사의 접근에 끼친 영향력이다. 즉, 전문 역사가들이 무시해온 미디어 속에 드러나는 역사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역사학에 ‘가상적 전환(virtual turn)’ 같은 것이 일어났음을 가정한다. 대중이 역사적 감각을 키워온 방법을 살펴보며, 특히 과거라는 것이 어떻게 빠른 시간 안에 상품성을 얻어왔는지 연구한다. 한 사회가 역사를 어떻게 소비하는가 하는 문제는 현대의 대중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며, 재현 자체와 관련된 이슈를 이해하는 데도,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자기이해와 사회적 구성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다. 이 책이 영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연구한 결과물이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와 대중문화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이유이다. 한 사회가 역사를 어떻게 소비하는가 하는 문제는 다양한 종류의 미디어와 사회경제적인 모델을 통해 ‘소비’를 설명함으로써 ‘소비’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질문도 할 수 있게 해준다. 소비 행위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것에 영향을 끼치며, ‘과거’가 사회 속에서 스스로를 어떤 모습으로 드러내느냐를 정의하는 데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저자 : 이윤정 , 출판사 : 한울아카데미 , 입수일자 : 2024.09.12 ]]>
이윤정 2024-09-12
<![CDATA[역사의 공간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역사를 통해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을 사유하다 역사를 통해서 외부성과 소수성, 타자성을 사유하는 그런 공간. 나는 그 공간이 흔히 말하는 역사, 대문자 ‘역사’에 의해 지워지거나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 것들에 눈을 돌리고 그것들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역사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이런저런 주제들에 반복하여 소수자나 외부성, 타자성이라는 개념을 끼워 넣고 그 안에서 작동하게 하고자 했던 시도가 읽는 이들과 함께 새로운 공동성을 생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이진경! 처음으로 ‘한국의 역사’를 말하다 “《역사의 공간》이라는 책은 저를 아는 사람들이 보면 당황스러워할 것 같습니다. ‘이진경이 이런 책을 썼어?’ 하면서 말이죠. 그 동안 제가 책을 20여 권 집필했는데, 한국의 역사와 관련해서 글을 쓴 것은 《역사의 공간》이 처음입니다. 예전에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건축사’ 관련 글을 썼습니다.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이라는 책으로도 출간되었지요. 그때 심사하던 분들이 저에게 ‘재능이 있는 친구가 한국 역사는 안 하고 남의 역사를 하고 있다.’고 한 적이 있었어요. 당시 저는 역사 공부를 한다는 생각보다는 근대성, 근대적 주체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행동해왔는가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한국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로서는 역사 의식의 결여, 이런 것들로 읽혔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런 점에서 보면 이번에 한국 역사, 한국에서의 역사에 대한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는 내용들이 이진경이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얼굴로 다가가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무척 독특한 책이 될 것입니다.”(2010년 1월 12일 ‘역사의 공간 출간 기념 강의’에서) 80년대 맑스와 더불어서 공부하고 사유하는 삶을 살았고(《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방론》), 90년대에 푸코, 들뢰즈/가타리 등과 함께 삶과 철학을 나누며 탈주의 철학(《맑스주의와 근대성》, 《철학과 굴뚝청소부》, 《철학의 탈주》)을 사유했고, 2002년 그 탈주의 철학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형태로 밀고나가 유목주의, 혹은 생성의 철학(《노마디즘 1,2》, 《철학의 외부》, 《미-래의 맑스주의》)을 기획하고 실천하면서 자본주의 근대성에 대한 날선 사유와 코뮨의 실험을 지속해온 지식인 이진경! 그가 이번에 ‘한국의 역사’를 횡단하며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을 사유하는 책 《역사의 공간》을 발간하였다. 한국적인 역사, 한국에서의 역사에 관한 글을 처음으로 묶어 발간하는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주요한 개념인 ‘외부’라는 개념을 역사라는 단일한 시간 속에 집어넣어, 하나의 이야기만을 생산하는 대문자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았고,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절단 채취하여 새로운 삶의 가능성의 공간을 탐사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상이한 시기에 상이한 계기에 의해서 쓰인 것들이다. 그래서 다루는 주제나 글의 성격, 심지어 글의 길이나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르다. 진지하고 무거운 학술 논문에서 강의나 강연을 위한 원고, 그리고 정세 분석적인 글에서 칼럼 같은 글들이, 상이한 상황에서 상이한 독자나 청중을 대상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글들의 요철이 매우 큰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들을 하나의 책으로 모으게 했던 것은 일단은 모두 한국의 과거나 현재에 대한 글이라는 아주 평범한 ‘공통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통성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은다는 것에 의해 만들어지는 어떤 ‘공동성’이다. 이 이질적인 글들을, 그 요철마저도 그대로 둔 채 하나로 모음으로써, 그 글들이 함께 모여서 만들어내는 어떤 공동의 것이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글을 쓰거나 모으는 것 이외에 읽는 독자의 행위가 또한 함께 모이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읽는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임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그 공동의 것이 무엇인가를 미리 정할 수는 없을 테지만, 아마도 거기에는 몇 가지 성분이 포함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역사, 시간, 정치, 소수자, 타자성, 외부성 등등이 그것일 것이다. 결국 ‘공동의 것’이란 아마도 이런 개념들로 표현되는 사유의 공간일 것이고, 그리고 그로부터 나름의 색깔을 갖고 나름의 선을 그리는 상이한 사유들이 그려지는 공간일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 외부성과 소수성, 타자성을 사유하는 그런 공간. 나는 그 공간이 흔히 말하는 역사, 대문자 ‘역사’에 의해 지워지거나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 것들에 눈을 돌리고 그것들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역사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이런저런 주제들에 반복하여 소수자나 외부성, 타자성이라는 개념을 끼워 넣고 그 안에서 작동하게 하고자 했던 시도가 읽는 이들과 함께 새로운 공동성을 생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럼으로써 역사의 공간이 비가시적인 것이 가시화되고, 자격 없는 자들이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럼으로써 역사의 공간은, 혹은 역사 자체는 비로소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 《역사의 공간》 11~12쪽, 〈저자 서문〉에서역사를 통해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을 사유하다 ― 이 책의 특징 1 역사란 시간적인 구성물이다. 그것은 구성되는 지대, 구성되는 양상마다 다른 시간을 갖는다. 하나의 민족으로 묶는 역사만큼이나 그것을 분할하는 다양한 집단들의 역사, 혹은 다양한 개체들의 역사가 있다. 그 모든 집단, 그 모든 개체들마다 각자의 시간, 각자의 리듬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문자로 쓰인 ‘역사’는 언제나 이 상이한 시간들을 하나의 시간 안에 포획하거나 포섭한다. 수많은 이질적 시간들이 하나의 ‘민족’이나 ‘국가’의 시간, 하나의 ‘세계’의 시간, 하나의 역사의 시간에 의해 지워지고 보이지 않게 된다. 역사는 과거의 엄격한 사실들을 기록하는 것일까? ‘사실들을 기록한다’는 것은 이미 어떤 것을 기록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짜는 것이다. 어떤 것을 선별하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기에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두고 항상 싸움이 벌어진다. 하나의 스토리, 하나의 기억을 만들어야 하기에 이곳에서는 매번 쟁투가 벌어진다.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역사가 다시 쓰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이러한 대문자 역사에 대항하는 반-역사를 사유한다. 그는 ‘외부’라는 개념을 통해 역사를 다시 사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외부란 무엇인가? 외부에 의해 사유한다는 것은, 불변의 내적 본질 같은 것은 없으며, 어떤 것도 그것과 만나는 외부에 의해 그 본질이 변화함을 보는 것이다. 매우 근본적인 위상을 갖는 이 ‘외부’라는 개념은, 동시에 매우 정치적이기도 하다. 외부를 향해 열려 있음은 나와 다른 것, 이질적인 것을 긍정함을 뜻하고, 뜻밖의 것을 긍정하는 것을 뜻하며, 그런 외부와의 만남을 통해 ‘나’나 ‘우리’ 혹은 ‘조국’이라고 불리는 내부가 변화하는 것을 긍정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 공간》은 ‘외부’라는 개념을 통해서 한국 근현대사의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중요한 거점들을 연결하는 새로운 지도를 그리고 있다. 근대적인 시간 관념, 역사 관념, 진보 관념은 무엇을 통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역사, 시간, 진보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대문자 역사는 무엇을 배제해왔는지를 탐사한다. 그리하여 견고한 대문자 역사의 외부에 있는 반역사적인 돌발―이것을 사건이라 부른다―을 통해 주류적인 역사에 구멍을 내고자 하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을 사유하는 이 공간이 흔히 말하는 역사, 즉 대문자 ‘역사’에 의해 지워지거나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 것들에 눈을 돌리고 그것들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주자들을 받아들이면서도 제한된 공간 안에 가두는 방식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그러한 공간적 제한을 통해 만들어지는 시간의 차이를 착취하기 위한 것이다. 시간이란 시계로 표상되는, 이미 주어져 있고 무얼 하든 동일하게 ‘흘러가는’ 자연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의 리듬을 통해서, 혹은 동조된 리듬을 통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공동성이란 서로의 신체적인 움직임을 맞추어가는 리듬의 구성을, 그것을 통해 만들어지는 시간적 동조를 포함한다. 그렇기에 구성되는 리듬의 차이마다 다른 시간들이 존재한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의 착취는 무엇보다 이런 시간의 차이를 착취하는 것이다. 화폐자본에서 상품자본, 생산자본을 거쳐 다시 화폐자본으로 돌아가는 자본의 순환은 자본의 생존의 리듬을 갖는다. 이 순환의 리듬을 맞추지 못하면 자본은 흑자상태에서도 파산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자본의 순환에 부분적으로 맞물려 있지만 이와 전혀 다른 노동력의 재생산의 리듬이 있다.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아 그것으로 생활수단을 구매하여 소비하며 다시 이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노동력을 팔러 자본가에게 가야 하는 노동력의 순환이. 이 순환의 리듬을 맞추지 못하면 노동력은 재생산되지 못하고, 노동자는 죽는다. 자본의 시간과 노동력의 시간, 이 상이한 시간의 차이를 자본은 착취한다. 노동력의 순환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최소치와 자본의 순환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최대치의 차이를 맑스는 잉여가치라는 개념으로 정의한 바 있다. 역으로 잉여가치란 이러한 시간의 차이를 착취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역사의 공간》 14~15쪽, 〈저자 서문〉에서근대 초기 ‘한국에서의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이 책의 특징 2 우리가 ‘역사’를 말할 때 항상 두 가지 용법으로 사용한다. 하나는 어떤 사실도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조건’에 따라 그 의미나 효과가 달라진다고 말할 때의 역사다. ‘역사성’이라는 말로도 불리는 이 역사의 개념에서 역사는 과거 사건들의 집합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도 아니고, 어떤 사실의 의미나 가치를 항상-이미 특정한 양상으로 규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 준거틀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사실이 특정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 되도록 만드는, 그 사실의 의미나 본성을 끊임없이 다르게 만드는 ‘외부’의 다른 이름이다. 맑스가 어떤 한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특정한 관계’라고 하면서 ‘역사유물론’을 정립했을 때, 거기서 사용되는 ‘역사’라는 개념은 정확하게 이런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접하는 ‘역사’라는 말은 어떤 하나의 연속적 흐름에 통합된 지나간 사실들의 집합을 말한다. 그것은 현재에 부단히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미래적인 방향을 부여한다고 믿어지는 사실들의 연속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것은 누구도 자의적으로 바꿀 수 없는, 저기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실증성’을 갖는 사실들의 집합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들은 대개 어떤 위대한 기원에서 시작하여 고난과 파란을 거치면서 결국은 다시 어떤 위대한 미래로, 위대한 종착점으로 향해 가는 하나의 서사로 구성된다. 우리는 ‘지나간 사실들의 집합’이라는 역사 관념에 너무 익숙하지만, 사실 역사란 다양한 사실들, 사건들을 연결하여 만들어지는 하나의 이야기(histoire), 하나의 서사(narrative)다. 역사는 사실들의 서사적 구성물이고, 따라서 그것은 실재적 사실들로 만들어지지만 그저 실재적인 것만은 아니고, 구성적이지만 그저 허구적인 구성물만은 아니다. 역사는 실재와 허구 사이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가 ‘하나’라는, ‘보편적’이라는 관념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역사가 발전한다는 관념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근대 초기 한국에서는 이러한 역사, 역사 관념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 저자는 〈대한매일신보〉(1904~1910년), 〈독립신문〉(1896~1899년), 〈황성신문〉(1889~1904년)의 논설, 잡보 등의 자료를 섭렵하여, 근대 초기 한국에서의 근대적 시간-기계의 작동 양상, 영토적 공간 개념의 탄생, 역사적 시간 개념의 탄생, 근대 초기 역사 관련 개념들의 인접성과 비대칭성 등에 대하여 치밀하고 흥미로운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좋고 우수하다는 생각의 계몽이나 확산이 그것을 실제로 사용하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근대적인 시간성의 영역과 만나고 그것을 자신들의 삶의 조건으로, 일상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우리의 가설적인 대답은 신문이 거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학교나 교회가 그러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근대적인 시간관을 갖는다는 것, 혹은 근대적인 시간을 일상생활에서 수용한다는 것은 단지 양력에 따라 날짜를 매기고 시간을 지키는 훈련을 한다는 것 이상의 좀 더 근본적인 사고방식의 변환을 요구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시간을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건이나 영역들에 대해 단일한 기준 내지 척도로 적용하는 능력과 사고방식, 혹은 태도와 습속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이질적인 삶의 요소들을 하나의 시간적인 좌표계 안에서 통일하고 통합하여 파악하는 능력이 획득된다. 그것이 없다면, 양력은 달력을 볼 때나 날짜 계산하는 데 사용되곤 그만일 것이고, 시계는 학교나 교회 등의 매우 제한된 영역에서 사용되곤 그만일 것이다. 그러한 국지적 사용으론 근대의 시간적 생활방식은 물론 근대적 시간관 또한 실질적으로 습득하여 사용한다고 말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근대적 시간관을 형성하는 데서 정작 중요한 것은 달력을 보지 않을 때도, 시간 약속을 하거나 지키지 않을 때도, 하나의 단일한 시간적 좌표계 안에서 다양한 사건들을 포착하고 배열하며 관련짓는 것이고, 그러한 관련에 따라 개개의 사건이나 사실이라는 부분을 전체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통합하여 사고하고 행동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문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새로운 시간관이나 시간 개념을 계몽하고 그것의 사용을 적극 주장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생각에 적극 동조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 종류의 시간관을 사용하고 다양한 사건을 하나의 시간적 좌표계 안에 통합하여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수학이 중요하며 그것을 잘해야 한다고 적극 동조한다고 해서 수학을 실제로 잘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반면 그런 생각을 명시적으로 하지 않아도, 실제 수와 계산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은 수학을 실질적으로 이용하는 데 근접하게 된다. 신문이 근대적 시간관을 습득하여 사용하는 실제적인, 그리고 핵심적인 조건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 우선 그것이 근대적인 시간성이 작동하는 실질적인 장(場)을 형성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 《역사의 공간》 187~188쪽, 5장 〈근대적 시간은 어떻게 ‘선험적 시간’이 되었나?〉역사, 진보의 미래를 다시 사유하다 ― 이 책의 특징 3 현재를 과거의 누적으로서 설명하고, 그러한 변화의 연속 속에서 미래를 정의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누적의 과정을 ‘진보’라는 원리에 의해 정의하는 것, 그것이 19세기에 완성되어 이후 지배적인 것이 된 역사와 진보 개념이다. 이것들이 결합되면서 역사는 자신의 내적인 발전 논리를 갖고 그 자체로 존립하는 실체가 된다. 이러한 진보의 개념은 단지 지나간 역사를 추스르고 통합하는 것만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사태, 아니 아직 오지 않은 사건조차 자신의 거대한 역사 안에 통합한다. 다양한 과거들에 하나의 방향을 부여함으로써 얻어진 궁극적 지점은 목적론적 원인이 되어 현재를 추동하며, 나아가 현재 시제의 역사적 벡터들이 갖는 다양한 방향들에 대해 평가의 척도로 작용하는 초월적 기준이 된다. 그 기준에 따라 우리는 하나의 사건이나 시도들에 대해 진보적·반동적이라는 이항적 절단기를 작동시킨다. 이런 점에서 이 거시적 진보의 개념은 목적론적일 뿐 아니라 초월적인 위상을 갖는다. 이와 다른 진보의 개념은 불가능한가? 저자는 미시적 진보, 미분적 개념으로서의 진보를 제안한다. 우리는 적분적 진보의 개념과 대비되는 미분적 진보의 개념이, 거시적 진보의 개념에 반하는 미시적 진보의 개념이 있을 수 있음을 상정할 수 있지 않을까? 연속성에 반하는 불연속적 진보의 개념이, 하나의 척도로 모든 것을 동질화하는 진보와 달리 이질적 성분들의 만남을 포착하며 사건을 구성하는 이질적 진보의 개념이, 하나의 초월적 기준을 통해 포착되고 평가되는 진보와 달리 내재적 관계에 의해 포착되고 평가되는 내재적 진보의 개념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적분적인 진보의 개념이 시간의 누적을 통해 변화를 하나의 결과로 통합하는 것과 달리, 미분적 진보의 개념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그 조건을 밀고 가는 관성적인 벡터와 다른 이탈의 벡터를 가동시킴으로써 그 조건을 변혁하려는 성분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 그 조건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잠재적 포텐셜(potential)을 포착하여 새로운 방향적 성분으로 변환시키거나, 아니면 다가오는 잠재적 사태와 현재의 사태를 잇는 새로운 계열화의 선을 현재를, 혹은 과거조차 변환시키는 것이다. 진보란 주어진 조건의 관성적 지속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미 처음부터 내장된 것이 펼쳐지는 ‘전개/발전(Entwicklung)’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유지하는 말 그대로 ‘보수적’ 성분에 반하여 전복 가능성을 실험하는 변환의 벡터에 의해 가능하리라는 것이다(비록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해도, 그것 없이는 진보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관성적 벡터를 밀고 가는 것과, 거기서 이탈하는 포텐셜을 가동하는 것의 차이를 안다면, 이 두 가지 진보의 개념은 상반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역사의 공간》 121~122쪽, 3장 〈‘진보’ 개념의 미래〉에서새로운 삶의 가능성, 소수적인 역사는 어떻게 가능한가? ― 《역사의 공간》 출간의 의의 대문자 역사의 직선을 뚫고 나오는 돌발적인 사건들은 항상 있다. 그것은 안정적인 역사의 지반을 흔들며 출현하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대문자 역사의 얼굴에 피를 튀기며 나타난다. 이런 돌발적 사건들은 당시의 역사로선 매끄럽게 싸안을 수도 없고 적당하게 한 자리를 주어 잠재울 수 없는 것으로서 역사 안에 출현한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역사가 쉽사리 봉합할 수 없는 균열의 지점이 된다. 그래서 대부분 배제하거나 지워버려서 소리 나지 않게 하려고 하지만, 그로 인해 지워진 소리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진원지가 된다. 즉 그것은 역사가 담을 수 없는 사건이지만 그렇다고 지워버릴 수도 없는 사건이란 의미에서 ‘역사적 이성’의 무능력의 지대를 형성한다. 그것은 역사화할 수 없는 사건이다. 저자는 이를 ‘반역사적 돌발’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돌발은 우리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역사에서도 흔히 있는 사건이었으나, 우리의 눈에는 보여지지 않거나 들리지 않을 뿐이다. 전태일, 광주항쟁, 이주노동자, ‘재일조선인’의 역사, 식민지 민족의 역사, 여성들의 역사, 그리고 흑인들의 역사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소수자, 혹은 소수성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소수적인 역사는 것은 언제나 대문자 역사와 대결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광주항쟁이 역사와 대결하는 방식은 역사를 쓰는 것보다는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사파티스타의 경우 지워진 역사에 대해서, 그 망각에 저항하는 방식은 총을 들고 봉기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점에서 역사와 대결하는 일종의 대항 역사를 쓴다고 하는 것, 이것은 그냥 글을 쓰는 작업하고는 다른 것이다. 글을 쓰기 이전에 실질적인 행동, 실천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후에 기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전태일이 분신을 하거나 광주에서 사건이 나거나 그런 것들이 사건이죠. 소수적인 돌발. 돌발적인 사건이에요. 돌발적인 이유는 역사에서 담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돌발인 것입니다. 아주 불편한 돌발, 이런 것으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역사에 담을 수 없는 사건이고, 역사의 외부를 이루는 것입니다. 외부라는 것을 통해서 역사를 흔들어버리는, 이런 의미에서 굉장히 역설적인 의미의 역사. 진보적인 역사는 그런 것들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대문자의 역사와 이런 소수적인 돌발의 역사가 대결하는 장(場)입니다. ‘역사의 공간’이라는 제목을 붙였을 때 역사라고 하는 것이 대문자의 역사 안에 자리 잡고 의미를 부여하는 역사는 아니었습니다. 이미 부여된 어떤 의미들, 기록되어 있는 것들과 대결하는 장, 그런 점에서 다른 역사를 구성하게 만드는 대결의 공간이 되게 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서 제가 타자의 입장에서 서야 한다는 것, 소수자의 입장에서 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10년 1월 12일 ‘역사의 공간 출간 기념 강의’에서) 이주의 시대, 동아시아만이 아니라 인도, 방글라데시, 네팔, 스리랑카에서 버마, 필리핀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으로부터 시작된 이주자들의 흐름이 아시아 전체를, 혹은 세계 전체를 횡단하는 시대에, 자국을 떠나고 자국의 동일성/정체성을 버리며 이질적인 새로운 상대와 만나고 섞이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이 거대한 흐름에서 ‘왜구’라고 명명했던 어떤 특이성을 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타니가와가 큐슈를 통해, 모리사키가 왜구를 통해 사유하고자 했던 것, 다시 쓰고자 했던 역사를 우리는 이 새로운 이주의 흐름을 통해 다시 사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우리가 사는 세계 전체를 적시고 있는 이주자들을 통해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으로써 이 이주자들을 불러들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제한하고 분리하고 비가시화하려는 힘에 대항하며, 역사를 치안이나 착취 아닌 정치가 가동되는 영역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 동안 꽤나 오래 반복되어 왔던 ‘동아시아’라는 상투화된 주제가 국가적 사유를 넘어 정치적으로 사유될 수 있다면, 바로 이런 방식을 통해서가 아닐까? 국경을 넘는 이주의 흐름이 범람하는 시기에 필요한 새로운 국제주의란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여기 실린 글들을 하나의 책으로 모으면서 이러한 몽상을 했다. 이런 몽상 속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찾고 싶다. 이 몽상을 통해 “이주자들을 착취하는 개 같은 나라”에서 계속 살아갈 방법을 찾고 싶다. 그리하여 외부자, 소수자, 타자들이 우리의 삶에 끼어들 균열과 여백이 만들어지길, 그것을 통해 그들과 더불어 새로운 공동의 삶, 새로운 공동의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길, 그리하여 그들과 함께 우리의 삶이 변하게 되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 《역사의 공간》 21~22쪽, 〈저자 서문〉에서 저자 인터뷰 《역사의 공간》의 저자 이진경 선생님은 2009년 3월부터 1년 동안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2010년 3월 말경 한국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2010년 1월 초 10여 일간의 일정으로 잠시 귀국하여 〈수유너머 N〉에서 강의하였고, 《역사의 공간》 출간을 기념하여 휴머니스트에서 강의를 하였다. 책 출간에 즈음하여 1월 23일 이진경 선생님과 이메일로 인터뷰를 하였다.(편집자주) ▶ 《역사의 공간》이 출간되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작품을 집필하였는데, 이전의 책들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책이 이전의 책들과 다르다는 것을 선생님은 어떻게 말하고 싶으신지요? 좋지 않나요? 아주 색다른 책, 뜻하지 않은 책을 낸다는 게?*^^* 사실 책을 많이 쓰다보면, 비슷한 책을 양산할 위험이 있는데, 그걸 생각하면 허구헌 날 같은 책만 쓰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사실 이 책에 실린 많은 글들은 뜻하지 않게 쓰여진 글들입니다. 그 동안 여러 가지 공부를 하고, 여러 책을 냈지만, 대개는 이론적 성격을 갖는 것이거나 서구에서 근대성에 대한 것이었지요. 이번 책은 한국에서의 역사, 그저 근대성에 대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다양한 주제의 역사에 대한 것이란 점에서 이전의 책과 많이 다르지요. 더구나 ‘조선세시기’나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 같은 것에 대한 것은, 저를 아는 분들로선 의외일 것 같아요. 그래서 〈The Other Side of Yi-Jinkyung〉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에요. 하지만 지금까지 쓴 책들과 그저 다르다고만은 할 수 없는 어떤 일관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가령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 등을 다루려는 관점이 그렇겠지요. 다른 것들, 이질적인 것들을, 그 이질성을 제거하지 않으면서 하나로 관통하는 것, 저는 사실 그것은 어떤 개념이나 이론들보다는 하나의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아주 다른 영역들을 횡단하게 만드는 것도 그 질문이었고, 그렇게 넘나들면서도 호사가적 취미나 박학을 자랑하려는 것과는 다르다고 스스로 믿는 것 역시 그 질문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 책들 속에서 그 질문을 읽어주시길 부탁드리고 싶어요. ▶ 역사란 시간적인 구성물이다. 그것은 구성되는 지대, 구성되는 양상마다 다른 시간을 갖는다고 하셨습니다. 어려운 질문입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역사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책에서 명시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인데, 제가 잘 드러나게 말하지 못한 듯 하군요. 역사란 사실들의 계열화를 통해 만들어지는 하나의 이야기지요. 그것은 통상 시간적인 순서를 따라 계열화되기에 시간적인 구성물의 형태를 취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렇게 만들어지는 시간, 시간적인 구성물은 어떤 경우든 같을 수 없지요. 모두 다른 시간, 다른 양상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것이 기록되기 시작한 때부터 사실은 모두 제국이나 국가, 왕조와 관련되어 있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민족 내지 국가단위의 역사, 이른바 ‘국사’라는 형태로 만들어졌지요. 그래서 역사란 대개 대문자 <역사>, 지배자나 지배적인 척도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인 셈입니다. 그것은 다른 이야기들, 다른 역사들을 지우거나 배제하는 방식으로, 혹은 포섭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이는 다른 시간들을 하나의 지배적 시간 안에 통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로써 시간의 차이가 착취되는 거지요. ▶ 2002년 《노마디즘》과 《철학의 외부》 출간 이후 선생님의 연구 방향과 관심사가 어디로 향해 있었는가? 하는 점이 《역사의 공간》에서 드러나는 것 같아요. ‘역사를 통해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을 사유한다’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에 대한 사건적 사유’라는 문장으로 표현하셨는데요.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요? 소수적인 것이란 마이너한 것을 뜻하는데, 주류적인 것(major)에 반대되는 것이지요. 지배적인 척도에 반하는 것, 그와 다른 척도를 창안하는 것, 혹은 그 지배적 척도를 전복하는 것이 소수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지배적 척도에서 요구되는 것의 단순한 결여나 부재를 뜻하는 ‘주변적인 것’과 다릅니다. 그것은 긍정적인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지금 지배적인 것을 와해시키는 것입니다. 타자성이란 동일자에 반하는 것이지요. 동일자란 어떤 것들을 동일화하는 것이고, 그 동일한 것의 지배에 포섭하는 것이며, 그것에 동일화되는 방식의 삶을 강제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필경 자신과 이질적인 것들을 따로 분리하거나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이를 ‘타자화’라고 하지요. 사실은 그런 타자화되는 것을 통해 동일자의 경계가 구획되지요. 이 경계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이 작동합니다. 그것은 주류적인 것의 척도가 작동시키는 권력과 동형적인 그런 권력입니다. 소수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이런 권력과 대결하면서 거기서 벗어난 새로운 삶의 지대, 삶의 방식을 창안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일자의 내부에 그것의 외부를 끌어들이는 것이고, 그 외부를 가동시켜 내부의 ‘질서’를 와해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고,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것이지요. 역사가 사유의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지배적인 이야기들을 입증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영역이 아니라, 이처럼 소수적인 것, 타자적인 것, 외부적인 것이 지배적인 것, 동일자와 대결하는 장이 될 수 있을 때라는 생각, 이런 걸 말하고 싶었어요. ▶ 이진경 선생님은 80년대에는 맑스와 더불어서 공부하고 사유하고 살았고, 90년대 들어서는 푸코, 들뢰즈/가타리 등과 함께 철학과 삶 등을 나누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는 이러한 탈주의 철학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형태로 밀고 나가 《노마디즘》이라는 새로운 생성을 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외부’라는 개념으로 사유를 전개하고 펴고 있습니다. 《역사의 공간》은 어떤 면에서는 역사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진경: 그것은 좋든 싫든, 뜻밖에 쓰여진 것들을 하나로 모으는 행위를 통해, 어떤 새로운 계열화를 시도하는 것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매끄럽게 이어지는 역사는 결코 아니지만, 울퉁불퉁한 채 그대로 하나로 이어지면서 만들어지는 어떤 하나의 이야기일 것이고, 그런 점에서 하나의 역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울퉁불퉁한 것은 역사란 본래 그렇게 울퉁불퉁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역사가 울퉁불퉁하다는 것은 그것은 언제나 생각지 않았던 것, 우발적인 것, 〈역사〉 안에 담기 힘든 것 등과 같은 ‘외부’를 담아야 하기 때문이고, 그런 외부적인 것들,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일 겁니다. 어쩌면 〈역사〉란 이 울퉁불퉁한 것을 하나의 ‘멋지고’ 매끈하게 이어지는 통 안에 담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반면 그런 하나의 매끈하게 이어진 선들 밑에 눌려 있는 것, 그 매끄러움을 위해 제거되거나 배제된 것, 혹은 거세된 것으로 하여금 그 매끈하고 멋진 껍질을 뚫고 솟아나게 만드는 것, 우아하고 깔끔한 분위기를 위해 침묵해야 했던 것들이 다시 소리나게 하고 웅성거리게 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역사’, 소수적인 역사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게 역사에서 외부라는 것이 작동하게 하는 것인 셈이지요. 역사란 이런 점에서 대결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것이 지배적인 〈역사〉와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교차하며 대결하게 될 지는 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닐 것이고, 제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닐 겁니다. 그것은 이 책이 불러들일 수 있는 어떤 또 다른 외부들과 만나서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의 것이겠지요. ▶ 앞에서 이전의 책들과 매우 다른 책이라고 하셨는데요. 매우 유크한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14개의 장으로 구성된 《역사의 공간》에서 그러한 면모가 잘 드러나고 있는 장은 어디라고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제가 자기 책을 두고 스스로 유니크하다고 말할 정도로 나르시시스트는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그보다는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대신 답해야 할 듯 하네요. 역사가 대결의 장, 혹은 계급투쟁의 장이라는 생각은 하나의 보편적 역사를, 역사법칙을 말하던 맑스주의의 공식적 역사관에서조차 말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역사〉와 역사들 사이에, 단지 상대적인 관점의 차이의 대결이라는 생각을 넘어서, 어떤 근본적인 대립과 대결이 있음을, 그런 점에서 주류적이고 다수적인 역사와 소수적인 역사의 대결을 부각시킨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더욱 곤란한 것은 ‘소수적인 역사’의 가능성인데요,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화되는 순간 〈역사〉의 일부로 편입되고 포섭된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역사의 공간을 〈역사〉에 떠넘겨주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역사〉의 일부를 이루는 방식으로 사로잡히지 않는 역사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질문했던 것, 대답이 아니라 그런 질문이 중요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역사 안에 외부성이 가동할 수 있는 여백과 공백을 만들어내는 것, 역사라는 장을 외부적인 사건, 소수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장으로 만드는 것, 이를 위해 〈역사〉를 반복하여 ‘탈영토화’하고 ‘해체’하고 전복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주류적인 사고방식, 주류적인 표상의 방식이 어떻게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되었는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 등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겠지요. 그것을 통해 우리 자신을, 익숙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낯선 것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것, 자신의 사고방식 안에서 작동하는 주류적 사고의 끔찍한 양상을 눈돌리지 않고 직시하는 것, 그리하여 자신이 사는 세계 안에서 이방인이 되는 것, 외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이 책의 에필로그를 ‘역사’라는 제목을 단 책과는 어울리지 않게 〈도그빌〉이란 영화에 대한 글, 이주자들, 외부자들을 착취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 안에서 뜻밖의 역할을 찾고자 했던 글을 넣었던 것은 이런 관점에서 아주 적절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이런 면에서 이 책에 ‘유니크한 면’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글로 책의 ‘결론’을 삼고자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 편집자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글은 2장 〈소수적인 역사는 어떻게 가능한가?〉였습니다.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과 자이니치의 관계, 자이니치와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꼈습니다. 한편 무척 어려운 글도 있었는데, 8장〈근대 초기 역사 관련 용어들의 용법〉이었어요. 〈대한매일신보〉에서 역사 관련 개념들의 인접성과 비대칭성을 이야기하는 글입니다. ‘상대빈도’ ‘상대빈도계수’등 수학 용어와 수식이 등장하여 좀 ‘거시기’했습니다. 인접성, 비대칭성, 상대빈도, 상대빈도계수 등을 사용하여서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지요? 독립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에서 ‘역사’ 개념의 탄생과정을 다루면서 느꼈던 약간의 아쉬움이 그런 ‘아카데믹한’ 글을 쓰게 했던 것 같네요. 그 신문들에서 역사와 관련된 개념들을 선별하여 그것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이해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지만, 그런 개념의 선별이나 그런 개념들에 대한 이해의 방식이 너무 자의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한편 있었거든요. 도대체 이런 개념들이 얼마나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그것이 그 시대의 역사 개념을 다루는데 어떤 ‘일반성’이나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건지 하는 일종이 자의식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일단 그 개념들의 출현빈도를 추적했는데, 양적인 사용빈도만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적었어요. 개념들의 의미라는 건, 말하는 사람이 부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연관된 개념들의 관계들을 통해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것이기에, 그런 개념들의 연관을, 계열화되는 양상, 혹은 ‘배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런 배치를 특정 인용문을 넘어서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예전에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에서 공간들의 배치를 단위공간들의 위상학적 관계를 통해 분석했던 적이 있었지요. 거기서는 영국의 힐리어와 핸슨이 사용했던 공간의 통합성(비대칭성)과 응집성을 분석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 글의 경우에는 비대칭성과 인접성을 통해서 개념들의 연관양상에 대한 위상학적 분석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분석하는 기술적인 방법은, 그렇게 누가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없었고, 적어도 사용할 수 있는 수학적 방법을 알고 있지 못했어요. 다만 관련된 개념들의 양적인 연관들의 분포를 놓고 이리저리 생각해보다가, 나름대로 그것을 분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셈이지요. 그리고 그것에 어떤 수학적 형식을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저는 그런 수학적 형식의 일반성을 증명하거나 하는데는 특별한 관심이 없었어요. 다만 개념들의 실제적 연관양상을 늘어놓고 이리저리 뜯어보고 생각하며 직관적으로 찾아낸 분석의 방법을 일반적인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분석을 진행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분석되어 나온 결과가, 그 앞의 논문에 썼던, 신문의 내용에 대한 분석을 통해 찾아낸 것과 동형적인 양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매우 기뻤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개념적 배치를 분석할 수 있는 일반적 방법을 스스로 찾아냈다는 것도 매우 기뻤구요. 물론 수학적 기법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라면 ‘아, 그거 이런 방법이 있어요’라고 말할 지도 모르지요. 요즘은 수학적 기법의 발전이 워낙 다양하니까 말예요. 그렇지만 그것이 제가 옛날 신문에 나오는 개념들의 연관들을 뒤져서 그런 일반적 방법을 찾아냈을 때의 기쁨을 무화시키진 못할 것 같아요. ▶ 모든 글이 중요하겠지만, 선생님께서 나름 애착을 가지고 많은 함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싶은 글이 있다면 이야기해주세요. 글쎄요. 책을 만든 편집자로선 하기 힘든 질문인 듯하네요. 책을 쓴 저자로선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구요. 그보다는 제가 글을 쓰고서 기쁨을 느꼈던 양상들, 지금도 기억나는 기쁨의 감응에 대해, 혹은 그와 약간은 다른 감응에 대해 몇 개 선별해서 말하는 게 나을 거 같네요. 먼저 소수적인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룬 글인데요, 그 글은 이 책의 기본적인 관점을 명시하는 글이란 점에서 주장이 선명하고 목소리가 강한 글이지만, 서문에 썼던 것처럼 거기에는 안타까움과 미안함 같은 감정이 섞여있어서, 단지 거기서 말하고 있는 제 목소리를 강조하는 것 역시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동반하는 듯 해요. 한편 글을 쓰면서 자기 생각이 크게 달라지는 경험은 그리 흔하지 않은데, 그런 글은 그런 만큼 애정을 갖게 되지요. 조선조 《세시기》에서 시간구조를 분석한 글이 그런 흔치 않은 경우에 속했어요. 시간의식이나 시간구조에 대한 관심에서 쉽게 생각하고 시작했던 것인데, 공부하고 쓰면서 근대 이전의 삶의 방식이나 사고방식에 대해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 글이예요. ‘귀신’이라고 불리는 존재자에 대해, 그것들이 사는 세계에 대해, 그리고 그것과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관계에 대해, 그 두 세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지금은 ‘미신’이나 ‘옛날 얘기’의 이름 아래 지워져버린 관계에 대해 크게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으니까요. 반대로, 쓰고 나서 예상했던 결론을 얻었지만 그렇기에 기뻤던 것은 앞서 말했던 역사 용어들의 사용양상에 대한 수학적인 글이예요. 생각지 않았던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는데, 그것이 나름대로 타당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식민지 인민은 말할 수 없는가??는 다른 이유에서 기쁨을 느꼈던 글이에요. 그것은 식민지 시기 역사에서 무언가 적극적인 어떤 인물이나 사유를 찾아내야 했는데-.-;;, 솔직히 찾기가 매우 어려워서 한참을 헤멨어요. 같이 세미나를 하던 후배들과 이리저리 헤매다가 말할 수 있는 어떤 출구를 어렵게 찾아냈고, 그런 점에서 보이지 않던 출구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 같은 것을 주었던 글이예요. 가족계획사업에 대한 글은 제가 살았고 제가 직접 경험했지만, 어렸기에 당대적인 현실감 속에서 분석하지 못했던 것을
저자 : 이진경 , 출판사 : 휴머니스트 , 입수일자 : 2024.09.30 ]]>
이진경 2024-09-30
<![CDATA[조선총독부박물관과 식민주의 :식민지 역사의 재현과 문화재 관리]]> 일제시기 식민지배의 대표적인 문화 도구로 활용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실체를 파헤친다! 이 책은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의 두 번째 권으로, 제국 일본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해온 주요 조직 중 하나인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다. 서구 열강은 제국주의 침탈 과정에서 원활한 식민지배를 위한 문화적 도구로 박물관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학술기관을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식민지에 설립된 박물관은 서구의 문명적 과업을 식민지인들에게 과시하고, 식민통치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제시한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근대 일본의 문화시설은 이러한 서구의 선행 사례를 모델로 한 것으로, 제국 일본은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박물관을 타이완과 조선, 만주 등의 식민지에 이식해나갔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은 1915년 12월 1일 경복궁 내에 개관했는데, 박물관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는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그는 원활한 식민지 통치를 위해 문화 침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의 박물관과 문화재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식민지 박물관으로서의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일제의 식민지 문화재정책에 부응하여 발굴품과 미술공예품을 통해 시대적 특질을 문화사적으로 조망하는 박물관을 지향하였다. 또한 실물 자료의 전시를 통해 조선의 문화를 재현하고, 이 과정에서 일본과 중국, 구미와의 비교를 겸하여 식민지 조선의 문화가 얼마나 열등한지를 스스로 자각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며, 아울러 조선에서 문화재 조사와 보호, 보전을 위한 행정 업무를 총괄한 식민지 문화행정기관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건물과 소장품은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국립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이 책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설립과 운영, 조사 과정 등 구체적인 활동을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사로서뿐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박물관으로서 총독부박물관의 특성을 온전히 규명하고자 한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유산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 조선총독부박물관 연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일제시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일본인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해방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을 미군정에 인계하기까지는 1년의 시간이 걸렸다. 인수인계 작업을 주도한 이는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근무하던 아리미쓰 교이치로, 그는 이후 일본 교토대학의 교수로 재직한다. 1998년 어느 날 아리미쓰 교수는 식민지 조선에서 직접 발굴했던 고고학 유적들의 보고서를 마무리하기 위해 관련 자료 협조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요청해왔다.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논의가 전개되었다. 발굴 유물과 관련한 유리원판사진은 식민지에, 발굴자와 발굴 기록은 식민 모국에 각각 흩어진 채 오랜 시간이 흘렀다면, 과거의 발굴 자료를 공개할 책임과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또한 학술 자료의 지적 권리와 정리의 책임은 발굴자에게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식민지 박물관을 계승한 현재의 박물관에 있는 것인가?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은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사로서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살펴본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과 전시, 조사연구의 연원은 불가피하게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비롯되었으며, 관리 운영 시스템 등도 상당 정도 영향을 받았음에도 일제시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언제 어떻게 성립되었으며, 무엇을 위해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현재 모습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선 시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실체와 내용을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설립과 운영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이 책은 그 오랜 연구의 결실이라 하겠다. 열패한 식민지 문화의 전파를 위해 탄생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실체와 흥망성쇠 - 이 책의 구성과 주요 내용 이 책은 1915년 세워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미군정으로 인계되기까지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제1부에서는 열패한 식민지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설립 과정과 목적을 살펴보았는데, 박물관 설립을 주도한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식민지 조선의 문화재를 수집하고 박물관 설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경위를 검토하였다. 특히 그가 수많은 문화재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총독부의 기밀비를 사용했기 때문임을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를 통해 밝혀내고 있다. 또한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와 총독부박물관의 연속성을 건축물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조선 문화의 재현과 식민지 문화재 관리에 근거한 총독부박물관의 설립 목적을 검토하였다. 제2부에서는 박물관의 조직과 주요 인력, 그리고 소장품의 입수 경로와 성격, 이 소장품들의 상설전시 등 구체적인 운영 과정을 통해 식민지 박물관의 토대가 구축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들려준다. 이 가운데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초기 컬렉션이 구축되어간 과정을 밝힌 내용은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의 역사를 살피는 재미를 넘어 당시 어떤 소장품을 수집하고 배제했는지를 알려준다. 특히 역사성이 배제된 고고품과 미술공예품의 상설전시는 식민지의 역사와 문화를 오브제 중심으로 일제의 의도에 맞게 재현함으로써 ‘유물에 의한 역사서술로서의 전시’가 아니라 단순한 시계열적 배열인 ‘유물’의 ‘역사적 전시(Historical Display)’였음을 확인시켜준다. 3부에서는 일제시기 변동과 파행으로 점철되었던 박물관의 고적조사사업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어떠한 역할을 했으며, 고적조사 주체가 변동됨에 따라 그들이 생산한 고고학 담론이 어떻게 경합했는지를 고찰하였다. 고대사 연구자인 저자는 그중에서도 특히 1925년 도쿄제대 문학부의 낙랑고분 조사가 이루어진 배경과 이때 발굴한 평양 석암리 205호 발굴 유물이 당시 도쿄제대로 반출된 후 오늘날까지 돌아오지 않은 역사를 자세히 들려준다. 이와 함께 1931년 민간 재원으로 설립한 조선고적연구회가 외부 자금을 끌어들이고자 가시적인 성과에 집중하게 되면서 화려한 유물이 출토된 평양의 낙랑고분과 경주의 신라고분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파행적으로 이루어진 한계를 짚어내고 있다. 4부에서는 1930년대 종합박물관 건립을 추진하다 좌절된 과정을 살피고 전시체제 말기에 소장품의 금속 공출에 의한 훼손 실태와 소장품의 소개(疏開)에 대해 살폈으며,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전시와 고적조사가 일본인이 독점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식민지 조선인들의 위치와 함께 박물관의 조선인 직원과 관람객 수의 변화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더불어 당시 조선총독부박물관 주변에서 고고학 지식을 소비하던 경성고고담화회의 활동을 자세히 들려준다. 일제시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식민지 박물관으로서 본연의 역할에는 충실했으나 여러 가지 근대적 성격이 착종된 복합성과 증층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해방을 맞이하면서 조선총독부박물관은 국립박물관으로 이어졌으나 조선인 연구자와 박물관 운영자가 전무한 상태에서 아리미쓰 교이치 등을 강제로 억류하면서 박물관 운영의 지식을 전수받아야만 했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박물관의 그림자는 지금도 여전히 국립중앙박물관 곳곳에 짙게 드리워 있다. 이 책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시작과 끝에 이르기까지 그 미완의 역사를 온전히 재현함으로써 국립중앙박물관이 미래로 나아가는 데 작은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다.
저자 : 오영찬, , 출판사 : 사회평론아카데미 , 입수일자 : 2024.09.12 ]]>
오영찬, 2024-09-12
<![CDATA[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 :감정의 연대기 1929~1939]]> 수많은 지식인의 찬사를 받은 『1913년 세기의 여름』의 11년 만의 후속작 미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 브라질, 네덜란드, 노르웨이, 러시아, 중국, 체코 등 20개 국가에서 번역 출간 어두운 현실에 예민하게 맞선 예술가들의 사랑과 배신, 환희와 공포의 스펙터클 여러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사랑은 말 그대로 ‘전쟁 같은 사랑’이다. 자유연애를 선언한 사르트르의 끝없는 바람기 때문에 보부아르는 남몰래 괴로워하고,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는 아내 젤다가 동성의 연인과 사랑에 빠진 사이 알코올과 사랑에 빠져 있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미쳐버린 젤다는 정신병원을 전전한다. 피카소는 아내 올가를 옆에 두고도 마리테레즈를 새로운 뮤즈로 삼는다. 하이데거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남자와 결혼한 한나 아렌트는 여전히 하이데거를 잊지 못하다가 또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 시인 고트프리트 벤의 바람기 때문에 그의 애인이 자살하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애인의 친구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다.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 고트프리트 폰 크람은 결혼한 몸이지만 동성의 애인이 있고, 그의 아내는 남편의 복식 파트너와 애인 사이다. 그러면서도 크람 부부는 서로 사이가 좋다. 작곡가 쿠르트 바일은 바람난 아내를 여전히 사랑하기에 아내가 프랑스 휴양지에서 애인과 카지노를 전전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는 동안 열심히 작곡으로 돈을 벌어 아내에게 보낸다.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망명지마다 애인이 있는데, 모두 브레히트가 자기를 배반한 나쁜 남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물심양면으로 그를 돕는다. 스탈린의 두번째 아내 나데즈다는 남편이 부정한 일을 저지를 때마다 거침없이 지적하다가 크렘린궁에 벌어진 공산혁명 15주년을 기념한 연회에서 크게 부딪치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가 권총으로 자살한다. 이쯤 되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베라 부부처럼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게 지내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고 해야 할 정도다.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근친애, 지고지순한 사랑, 이기적인 사랑, 불같은 사랑, 권태로운 사랑 등 모든 종류의 사랑이 적나라하게 펼쳐지는데,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라는 점에서 더 짜릿하고 충격적이다. 우리가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던 인물들의 배신과 기만, 궁색한 변명과 끊임없는 바람기 등을 보고 있자면 말 그대로 입이 쩍 벌어지기도 한다.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요즘 ‘막장 드라마’ 못지않은 그들의 사랑은 정말 ‘광기’라고밖에는 설명이 안 될 지경이다.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그들의 감정과 행동은, 어두웠던 현실 속에서 그만큼 예민하게 반응했던 자유로운 정신의 발현일지도 모른다. 비난은 할지언정 증오로 단죄하지 않는 그들의 넓은 포용 정신이 그토록 찬란한 예술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잿빛 과거를 생생한 현재의 순간으로 데려다놓는 흥미진진한 시간 여행 로베르트 무질은 “세계의 역사는 적어도 그 절반은 사랑의 역사”라고 말했다. 거대한 사건의 흐름을 통해 대문자 역사로 인류의 여정을 정의하는 거시사로는 결코 알아낼 수 없는, 종종 지극히 개인적이고 그만큼 감상적이라고 폄하되기도 하는 미시사의 중요성을 매우 잘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문화사와 예술사에서는 여러 영역을 넓게 다루는 것보다 한 영역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한 시대의 사람들이 어떤 곳에 살았는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옷을 입었는지, 그들이 누구와 만나고 헤어졌는지에 관한 세세한 조사와 분석을 통해 우리는 현재의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플로리안 일리스는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과 같은 문체로 오래전 일어난 일을 마치 지금 막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독자들의 눈앞에 생생하게 가져다놓는다. 그의 문장은 한순간 우리를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치즈케이크를 먹던 베를린의 카페 크란츨러의 옆자리로 데려가고, 어느 사이 살바도르 달리와 갈라와 함께 눈부신 해변에 누워 있게 하며, 토마스 만과 카티아와 함께 망명지로 도피하게 만든다.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은 이야기의 재미와 역사적 지식 중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다루는 시간 이후 100년의 세월을 향해가는 2024년, 지금 우리의 삶은 그들과 어떻게 다를까. 코로나와 그 이후 시대의 사랑, 여전히 지구촌 한구석에서 전쟁이 벌어지지만 대체적으로 평온하고 지루한 척하는 양극화 시대의 사랑, 이민자와 젠더 갈등을 둘러싼 증오 범죄가 만연한 시대의 사랑, 더이상 멈출 수 없는 자본주의의 총천연색 사랑. 무자비한 전쟁을 겪으며 황폐해진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모두들 무기력해진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그들의 스펙터클한 삶, 열정적인 사랑을 보노라면 우리 시대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보일 듯도 하다.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은 이토록 흥미진진한 시간 여행으로 우리를 데려가줄 최고의 안내서가 되어줄 것이다.
저자 : Illies, Florian, , 출판사 : 문학동네 , 입수일자 : 2024.09.12 ]]>
Illies, Florian, 2024-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