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S 서비스 http://lib.jnue.kr/JNUE 전주교육대학교 도서관 : 최신소장자료 ko 2025-01-12T00:01:01+09:00 Copyright (c) 전주교육대학교 도서관 All right reserved <![CDATA[교화와 형벌 :조선의 범죄 대책과 『경민편』]]> 정호훈, 2024-12-23 <![CDATA[명청교체기 대명 해로사행로의 노선과 지명 재구 및 인문지리학적 고찰.1,산동 등주부]]> [머리말] 명청교체기 해상사행로를 통해 명을 오갔던 조선사신의 중국 사행 기록인 해로조천록(연행록)에는 명청교체기 조선과 명, 청 사이에 이루어졌던 치열한 외교 활동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문인들의 명과 청에 대한 인식, 명과 청 및 조선과 일본 사이의 전쟁의 양상,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무역과 경제 관계, 문화와 인적 교류 상황 등 다양한 역사적 사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중국 사행은 조선 문인들에게 나라 밖을 경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으며, 사행 활동은 중국의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을 제공했다. 그런 점에서 사행활동이 이루어진 사행로와 사행 경유지는 단순히 지도 상에 점과 선으로 표시된 물리적 교통로나 감정없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 선조들이 역사의 현장에서 국가의 안위를 위해 몸으로 부딪히고 발로 뛰었던 발자취 곧 그 시대사적 고뇌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문화적 유산으로서 재인식되고 재이해될 필요가 있다. 조선사신들이 명나라로 사행을 가면서 주로 이용한 노선은 요동지역을 거치는 육로 노선이었다. 요동지역을 거치지 않고 해로 노선을 이용한 사행은 明初(洪武, 建文 연간1369-?, 崇禎 연간 1621- 차례 비교적 짧은 기간에만 이루어졌다. 明初 사행의 목적지는 남경이었고, 明末 사행의 목적지는 북경이었다. 해로 사행로는 원래부터 한반도의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여러 왕조와 교류했던 중요한 사행길이었다. 산동 등주(登州)에는 대대로 한반도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신라관, 발해관, 고려관이 운영되었다. 조선의 경우 1621년 3월에 후금이 심양과 요양을 탈취하고 요동 반도 전역을 지배하게 되자 사신들이 육로로는 안전하게 왕래할 수 없게 되었기에 선박을 이용해 바닷길로 산동 등주로 가게 되었다. 그 후 1637년 1월 후금(청)과 정축맹약(丁丑盟約)을 맺은 조선은 명나라와 국교를 단절하고 후금(청)의 수도인 심양에만 사신을 보내게 되었고, 1644년 3월에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한 후에는 조선 전기와 같은 육로 사행이 재개되었다. 본서에서는 명말 해로 사행 문헌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明末 해상 사행 관련 문헌들은, 명초의 해상사행 기록이 대부분 조천시 형식이었던 것과는 달리, 사행 중 겪은 구체적인 사건과 견문을 여정에 따라 기행문 형식으로 기록하거나 사행 관련 공문서와 편지 등을 함께 수록하고 또한 지리지 형식으로 기록한 것까지 있어서 공식적인 사행 활동이 이루어진 역사 현장, 현지 문인들 혹은 현지인들과 교류 양상, 당시 중국 현지의 상황, 민간풍속, 자연환경 등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문헌들이 많기 때문이다. 둘째, 기존의 조천록(연행록) 연구가 주로 요동지역을 사행로로 하는 《열하일기(熱河日記)》,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담헌연기(湛軒燕記)》등의 문헌에 대한 연구에 치중된 반면, 해상 사행의 실체를 체계적으로 밝히는 연구는 미흡했기 때문이다. 셋째, 조선 이전 신라, 발해, 고려 등 왕조들도 해상 사행을 공식적인 경로로 활용했었으므로, 조선 시기 해상 사행로에 대한 연구는 차후 신라, 발해, 고려 시기 해상 사행의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간접 자료로 활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서는 명말 조선사신의 해로 사행 관련 문헌을 주요 연구대상으로 하여 인문지리, 문학지리의 시각에서 사행 경유지 현지조사, 현지 연구자 및 주민 인터뷰, 문헌 고증 등의 방법을 통하여, 조선사신의 사행 노선을 재구하고 지명의 역사적 변천을 살피며 사행록에 나타난 시와 문장을 분석하고 조선사신의 외교활동, 중국 문인 및 현지 주민들과의 문화적 인적 교류활동의 실체를 파악하여 조선 사신의 중국 문화공간을 총체적으로 그려보았다. 명말 평안도 앞바다에서 출항한 조선 사신들은 조선과 요동의 연안 도서를 따라 항해하다가 여순구(旅順口) 부근 해역에서(지금의 요녕성遼寧省 대련시大連市 노철산老鐵山 해역 부근)에서 남하하여 발해를 건너 산동 등주(지금의 산동성 연태시 봉래)에 상륙하였다. 이후의 육로 경유지는 鄭斗源의 《朝天記地圖》에 따르면 등주부(登州府), 황현(黃縣), 황산역(黃山驛), 주교역(朱橋驛), 래주부(萊州府), 회부역(灰埠驛), 창읍현(昌邑縣), 유현(?금령역(金?, 제남부(濟南府), 제하현(濟河縣), 우성현(禹城縣), 평원현(平原縣), 덕주(德州)(이상 산동성 경내), 경주(景州), 부성현(阜城縣), 부장역(富莊驛), 헌현(?莫州), 웅현(雄縣), 신성현(新城縣), 탁주(?州), 량향현(良鄕縣), 제경(帝京)(이상 하북성 및 북경 경내)등인데, 본서는 앞으로 계속 출판될 시리즈물의 제1권으로 산동 등주 앞바다 제도(諸島)와 등주, 황현, 황산역까지의 등주부 노선에 대한 연구 성과물이며, 이후 래주부, 청주부, 제남부 등 사행의 노선을 따라 순차적으로 연구성과를 출간할 예정이다. 이 책에 담긴 연구는 우연한 계기로 시작되었다. 5년 전 학교에서 대학 교수들의 자체 연구역량 강화의 일환으로 중국 내 영향력 있는 학자들을 초빙하여 정기적인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유방학원학보(?坊學院學報)를 발간하게 되었는데, 당시 우리대학 중문과 조홍위 교수가 조선 사신이 쓴 웨이팡(명대 당시 유현?한국어문학과 소속이던 필자 일동은 명대 조선 사신들이 웨이팡 지역을 경유하면서 이 지역과 관련된 적지 않은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 알게 되었다. 필자 일동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조천록(연행록) 연구는 당시까지 발표된 논문만 500편에 이를 정도로 이미 방대하고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가 요동지역을 거쳐서 갔던 청대 육로 사행 관련 연행록 연구에 집중되어 있었고 명말 이루어졌던 해상 사행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었으며, 특히 중국 현지 답사와 명대 문헌에 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문학지리적, 인문지리적 연구는 초보단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건국대 중문과의 당윤희 교수, 웨이팡 대학 중문과의 조홍위, 진금방 교수, 한국어문학과의 왕가, 한종진 교수, 난창공대 영상매체학과 김보경 교수가 의기투합하여 본 연구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해외연구지원사업인 씨앗형사업에 지원하게 되었다. 많이 부족한 연구계획서였지만 웨이팡대가 위치한 지역이 바로 명말 조선 사신들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경유지인 “유현(?縣)”이었던 만큼 현지답사와 중국 현지 문헌 조사에 있어서는 다른 어떤 연구팀보다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지역 특화형 한국학 연구”라는 연구팀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었던 것인지 결국 좋은 심사 평가를 받아 2017년도 씨앗형 사업에 선정되는 기쁨을 누렸다. 우선 연구팀은 명말 평안도 해안을 출발하여 한국의 서해와 중국의 발해를 거쳐 산동 등주에 상륙한 조선 사신들을 모두 조사하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그들이 남긴 자료를 모두 확보하여 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한편, 사신들이 거쳐간 경유지에 따라 모든 문헌을 꼼꼼하게 강독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사신들이 동일한 경유지를 다양한 지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어떤 구간에서는 경유 경로가 많게는 서너 갈래로 갈라지고 있음도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경유지의 노선과 경유지의 지명을 사신이 남긴 기록과 더불어 당시 중국 내 통용되던 지방지 및 관련 역사서를 참고로 꼼꼼히 고증하였고, 이 고증의 결과를 현지 답사와 현지인 탐방을 통해 확인하고 수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현지인, 현지 학예연구사나 현지 역사 연구자의 호의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다. 사신들이 이용한 경로는 대부분 명과 청대 관방에서 관리하는 공식적인 관도(官道)였는데, 근대 이후 이 관도가 대부분 국도로 재건되거나 오랜 기간 방치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오랜 기간 현지에서 근무하면서 지방사지(地方史志)를 발간해 온 현지 학예연구사를 방문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필수적인 연구 과정이었고, 어떤 때는 학예연구사들조차 구체적인 위치와 지명의 변천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경우라도 다행히 현지에서 대대로 살아온 촌로들을 만나 그들의 증언을 통해 조선 사신들이 거쳐간 구체적인 경로를 확인하고 그 길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현지 답사 과정을 통해 조선 사신들이 직접 걸었던 들판, 직접 보았던 산천, 직접 건넜던 강과 다리, 직접 겪었을 당시의 풍속, 직접 맛보았을 현지 음식 등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남긴 시문 한 구절 한 구절이 생생하게 살아나 연구자들의 가슴에 와 닿는 묘한 경험을 하였으며, 현지 촌로들의 사투리를 통해 당시 동일한 경유지를 거쳐간 여러 조선 사신들이 현지 지명을 다양한 이체자(異體字)로 표기한 이유가 현지 사투리의 영향 때문임을 확인했을 때는, 연구자들 스스로가 사투리로 들은 지명을 어떤 한자로 기록해야 좋을지 고민했었을 조선 사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인문학은 공동연구가 어렵다고들 말하는데, 이번 연구는 한중 연구자간의 긴밀한 협력 속에서 공동연구의 장점을 십분 발휘한 결과여서 더욱 그 의미가 깊다. 특히, 한국과 중국의 연구자들이 각자의 관점을 한 걸음 양보하면서 서로의 입장과 해석을 균형있게 조율하여 공동의 연구성과물을 도출하였기에, 이 책은 21세기에 다시 쓰여진 연행록이라 부를 만하다. 이번 연구는 많은 이들의 도움 덕분에 완성될 수 있었기에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남기고 싶다. 매년 10여 차례에 가까운 현장답사를 다녀야 했고, 국내외 관련 연구자를 초빙하여 연구성과를 공유하고 토론하는 국제학술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중국과 한국에서 논문을 발표하고 학술서적을 출간하는 데에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되었는데, 한국정부(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의 3년간의 연구비 지원이 없었다면 본 연구는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연구 1년차에 연구방향과 연구방법을 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약간의 혼란과 실무적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카자흐스탄에서 열린 한국학 국제 세미나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안병욱 원장님과 한국학진흥사업단 구난희 단장님께서 보여주신 관심과 격려는 연구팀에게 큰 힘이 되었다. 또한 한국학진흥사업단의 실무책임자이신 김예원님도 연구팀의 사업계획변경 등 번거로운 업무 협조 요청을 친절하고 신속하게 처리해주어 연구팀의 원활한 연구 진행을 도왔다. 웨이팡대 측에서도 연구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연구팀이 모여 연구하고 연구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보관할 수 있는 공간과 기자재를 마련해 주었으며, 이 과정에서 외국어대학 한택정 학장님의 도움이 컸다. 건국대 역사학과 한승현 교수님은 연구팀이 개최한 국제 세미나에 참가하여 조선으로 귀화한 산동 왕씨의 족보와 연원을 탐구하는 논문을 발표하여 연구팀에게 문헌 고증과 현장 답사 방법의 모범적인 예를 보여주었으며, 조선 사신의 사행화를 오랜 기간 연구해 오신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정은주 선생님은 연구팀에 귀중한 자료와 조언을 제공해 주셨으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의 장유승 선생님은 웨이팡시 한정구 문화관리소에 소장된 문헌이 조선국왕의 표문이었음을 고증해주었다. 중국 측 연구자로는 산동성 봉래시청 지방사지 연구실(山東省 蓬?(高波) 과장, 산동성 봉래시 봉래각 관리처 문물과(山東省 蓬???, 산동성 용구시청 지방사지 연구실(山東省 龍口市政府 地方史志 辦公室) 학예연구사인 손건의(孫建義) 주임 등이 조선 사신의 경유지 고증에 도움을 주었으며, 또한 산동성 용구시 황산관진(山東省 龍口市 ?山館鎭)에서 지방역사를 연구하는 민간사학자 맹건(孟健)씨 등은 자신이 소장한 귀중한 문헌을 무상으로 연구팀에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귀한 시간을 할애하여 자신이 일찍이 고증한 적이 있는 조선 사신 경유지 유적으로 연구팀을 직접 인솔하여 현지답사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현장답사 과정에서 한국에서 온 연구팀을 기쁘게 환영해주시고 자신의 일처럼 짧지 않은 시간을 내어 사행 현장을 안내해주고 인터뷰에 응해 주신 수많은 현지 주민들께도 머리 숙여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이 책은 앞으로 계속 진행될, 조선 해상 사행록에 대한 문학지리, 인문지리적 연구의 첫 성과물로서 그 의미가 자못 깊지만, 동시에 처음 시도된 연구로서 착오와 오류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관련 연구자분들의 양해를 구하면서 많은 조언과 지도를 부탁드린다. 또한 앞으로 이 연구가 계속 진행될 수 있도록 관련 기관과 연구자들의 지속적인 지원과 성원이 이어지길 바란다.
저자 : 왕가 , 출판사 : 역락 , 입수일자 : 2024.12.23 ]]>
왕가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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