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S 서비스 http://lib.jnue.kr/JNUE 전주교육대학교 도서관 : 최신소장자료 ko 2024-12-23T00:01:01+09:00 Copyright (c) 전주교육대학교 도서관 All right reserved <![CDATA[(선생님이 들려주는)중국 속 우리 역사 이야기]]> 저자 : 김현진 , 출판사 : 푸른길 , 입수일자 : 2024.11.28 ]]> 김현진 2024-11-28 <![CDATA[(제주의 용암 숲) 곶자왈의 인문지리]]> 제주의 허파라고도 불리는 곶자왈은 다양한 식생과 경관적 가치뿐만 아니라 제주도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생활상의 소중한 공간이었다. 이 책은 곶자왈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삶의 궤적을 좇아가는 타임머신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책은 크게 4부로 구성되었다. 1부 〈곶자왈의 이해〉에서는 곶자왈의 인식과 이용, 그리고 변천사를 훑어본다. 2부 〈곶자왈 내 다양한 자원 특성과 활용〉에서는 선흘곶자왈, 교래곶자왈, 청수-저지곶자왈 등의 생활문화자원을 살펴본다. 숯가마, 노루텅, 물텅, 머들, 궤, 돌담, 산전 등의 분포 양상과 특성을 다루면서 특히 집단적 생활문화자원에 주목한다. 또한 숯 생산활동과 관련한 문화자원과 마을공동목장을 통한 주민 생활상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3부 〈곶자왈의 경관과 학습〉에서는 곶자왈의 경관 특성과 가치를 탐색하면서, 이를 통한 학습자원을 발굴하고 그 활용반안 등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4부 〈결론〉에서는 곶자ㅇㅘ? 존재의 의미를 다시 환기하고 있다. 기존의 곶자왈 관련 책들이 자연지리적인 관점, 환경생태적 관점에서 곶자왈을 다루었다면, 이 책은 생업과 생활사 등의 공간으로서 곶자왈에 남아있는 생활문화자원을 살핌으로써 제주 사람들의 삶과 밀착해 있던 곶자왈의 모습을 그려내고 그 가치를 전하고 있다. 저자는 책을 통해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곶자왈은 제주 섬의 자연을 구성하는 중요한 실체로 항시 존재하게 함으로써, 후세대들의 곶자왈 이용권을 박탈하지 않는 현세대의 성숙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가치 있고 진정성 있는 곶자왈의 이용을 바탕으로 우리가 진정 원하는 인간다운 삶을 어떻게 구현해 나가는 것이 올바른 길인지를 진중하게 생각해 볼 때라 여겨진다.”라고 전한다.
저자 : 정광중, , 출판사 : 한그루 , 입수일자 : 2024.12.09 ]]>
정광중, 2024-12-09
<![CDATA[경성학파의 인류학=Anthropology of Keijo school : from colonialism to militarism :식민주의에서 군국주의로]]> 저자 : 전경수= , 출판사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입수일자 : 2024.11.26 ]]> 전경수= 2024-11-26 <![CDATA[교과서와 역사정치 =Politics of history]]> 이 책을 기획하면서 선택한 열쇠말은 ‘역사정치’이다. 역사가 그 태생부터 정치와 무관하지 않고, 현실정치 속에서 역사갈등이 표출되고 있는 현실을 무시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역사, 정확히는 역사갈등과 정치와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1부에서는 한국에서 진행된 역사갈등의 요소들이 어떠한 정치적 맥락에서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이런 정치적 논란들이 어떤 과제를 남기고 있는 지를 주로 다루었다. 앞머리에 놓인 이정빈의 두 글은 한국 고대사를 둘러싸고 진행된 역사갈등을 식민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와 발전론이라는 한계 속에서 그 정치적 배경을 찾고 있다. 김정인의 글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1987년 이후의 역사갈등이라는 좀 더 넓은 차원에서 살핌으로써 그 정치적 의미를 추적하고 있다. 김육훈의 글은 국정화 논란이후 강화되고 있는 역사부정론이 역사교육에 미치고 있는 영향을 밝히고 있다. 2부는 모두 다섯 편의 역사교육 대안 모색 관련 글들을 묶었다. 그중 앞의 세 편은 독일과 한국의 이론적 논의에 관한 것이고, 뒤의 두 편은 현행 교과서의 서술 사례를 통해 대안을 모색해 보는 글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 모두 동일한 ‘역사정치’ 개념에 입각해 작성되었다고 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모든 글들이 역사서술과 역사교육이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또 논쟁을 통해 학생이나 독자 스스로 역사인식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화해와 포용을 위해 가해자 또는 가해국들이 피해자들의 입장을 수용하는 역사정치가 이해되어야 한다는 기초위에 놓여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민족주의에 기반한 국민정체성의 형성과 같은 고정적인 역사교육의 근대적 목표를 넘어보려 하고 있다. 이 같은 전제하에 우리는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이 책의 글들이 지향하고 있는 역사교육의 방향은 논쟁과 다양성을 중요시하면서, 민주시민 양성이나 평화지향의 역사교육에 기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학교와 학교 밖을 단절적이지 않고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사고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로 학교 현장은 논쟁을 통한 역사 수업을 통해 자신이 형성해 나갈 다양한 역사인식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가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는 짧게는 지난 20여 년간, 길게는 개항기 이래로 지속적으로 역사논쟁을 반복해 오고 있다. 그 강도는 최근으로 올수록 격렬해졌을 뿐 아니라, 전사회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것은 역사교육뿐 아니라 기억과 기념의 정치를 국민정체성 형성의 수단으로 강요하려는 정치적 의도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타국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식민주의적 역사인식과의 싸움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 같은 갈등이 쉽게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이 책이 그 같은 갈등을 해소하는 직접적인 대안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다양한 대안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저자 : 이신철, , 출판사 : 선인 , 입수일자 : 2024.12.09 ]]>
이신철, 2024-12-09
<![CDATA[국민과의 창설과 '국사'교육 :일제강점 말기 조선인의 역사교육]]> 저자 : 김보림, , 출판사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입수일자 : 2024.12.09 ]]> 김보림, 2024-12-09 <![CDATA[다시 조선으로 :해방된 조국, 돌아온 자들과 무너진 공동체]]> 이연식, 2024-12-12 <![CDATA[동아시아 근대지성의 탄생 :20세기 초 한중유학생의 궤적]]> 저자 : 이재령 , 출판사 : 신서원 , 입수일자 : 2024.11.26 ]]> 이재령 2024-11-26 <![CDATA[등용문 :중국의 과거시험 1300년]]> 중국 전통사회를 이끈 엔진, 과거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파헤치다 중국의 사회와 문화를 평생 연구해 오고 있는 오금성(서울대 명예) 교수가 1300년 동안 중국의 황제 권력을 지탱해 오던, 과거제도라는 세계 최초의 인재 선발제도를 흥미롭게 분석하고 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역사. 그 핵심 기능의 변천!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중국은 역사와 문화의 단절 없이 고대부터 현대까지 수천 년간 그 정체성이 유지되어 오는 세계 유일한 나라로, 그 배경에 과거제가 있다. 진나라 이후 문벌귀족을 기반으로 황제 권력이 나라를 지배해 왔다. 수많은 이민족들을 아우르고 한미한 세력들을 지배해 오다가 시행착오 끝에, 피지배세력을 이끌려면 빈부귀천의 차별 없이 능력만으로 인재를 뽑아 써야겠다는 것이, 과거제도의 기본 원리였다.(우리나라도 신라 말을 거쳐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과거제도를 운용했다.) 과거제의 핵심, 문벌귀족중심 사회를 능력위주의 인재선발로 바꾸다 이 과거제가 중국 전통사회의 기둥이었다면 그 주춧돌은 교육, 특히 공자, 맹자의 가르침이었다. 다시 말하면 황제 독재 체제 아래 사회 계층이동의 사다리, 출세의 사다리는 바로 이 과거제였던 것이다. 과거제는 7세기 수나라, 당나라 때 골간을 짜고, 1300년이 지난 1905년 서구의 근대교육의 물결 앞에 사라질 때까지 수명을 이어왔다. 1300년 과거제의 면면을 통해 한반도의 미래를 보자 주변 4강의 각축 속에서 한반도의 현 상황은 예측하기 어렵다. 중국과 함께 동아시아 문화권 안에서 때로는 다투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이웃이자 적으로 살아온 우리에게 중국 과거제의 흐름은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를 되새기면서 우리가 처한 이 현실을 직시하고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위기를 ‘메기효과’로 이용하여 전화위복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저자 : 오금성 , 출판사 : 지식산업사 , 입수일자 : 2024.11.26 ]]>
오금성 2024-11-26
<![CDATA[러시아와 이웃 국가들]]> Blinnikov, Mikhail S. 2024-12-12 <![CDATA[몰락의 대가 :기후위기와 물가 그리고 명제국의 붕괴]]> Brook, Timothy, 2024-12-12 <![CDATA[새로 쓴 프랑스 혁명사 :대서양 혁명에서 나폴레옹 집권까지]]> ◆ 새로운 역사 서술 방법론으로 집대성한 프랑스 혁명의 시작과 끝 저자 장 클레망 마르탱은 20세기 후반의 대표적 혁명사가인 알베르 소불의 계급사관을 거부한다. 저자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계층이 일으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계층이 혁명의 산물이라는 견해도 여전히 논증해야 할 일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물론 소불을 위시한 앞 세대 역사가들의 탁월한 연구 성과는 충분히 인정하고 계승하지만, 지나치게 중장기적 관점으로 혁명기를 재단하거나 특히 정치사상을 우위에 두는 방법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한마디로 저자는 아날학파의 세례를 받은 ‘역사 수정주의’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번역한 주명철 명예교수는 ‘프랑스 혁명사 시리즈 10부작’을 비롯해 관련 도서를 다수 집필, 번역해온 최고의 전문가로서 저자의 학문적 배경에 대해 이렇게 짚어준다. “아날학파는 ‘역사의 본질은 무엇인가, 새로운 역사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새로운 대상은 무엇인가’(1974, Faire de l’histoire)라는 질문을 던져 역사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 그들은 이미 활용하던 자료를 새로운 문제의식과 방법론을 적용해서 다시 읽었고, 특히 유언장이나 장서를 포함한 재산목록 따위의 공증인 자료를 발굴해서 사회 집단의 교육 수준과 정신자세라는 문화적 요소가 경제적 요소만큼 중요하다는 사실도 증명했다. 그 후 50년 동안 그들은 경제 중심에서 문화 중심으로 사회사의 지평을 넓혔고, 특정 사회 집단에 속한 개인이 저마다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거나 소비한다는 가설을 증명하는 미시사 영역의 길을 텄다. 프랑스 혁명사 연구도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이러한 여정에 얽혔고 그 혜택을 톡톡히 누렸다. 장 클레망 마르탱은 혁명과 반동에 관한 풍부한 지식과 방대한 사료를 마음껏 활용해서 이 책을 썼으며,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와 인포그래픽으로 보는 프랑스 혁명」은 이 방대한 역사적 사실과 흐름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지난 30여 년간 숱한 ‘사건’을 중심으로 프랑스 혁명기를 왕성하게 연구해온 저자는 영어권의 최근 연구 성과까지를 포괄하는 이 책에서 무엇보다 올바른 역사관의 정립과 서술 태도가 중요함을 역설한다. “아무런 정치관념도 없던 사람들이 위대한 정치와 민중 정치를, 합리적 분석과 예언을, 영웅주의와 추잡한 짓을 혼동하면서 복잡한 관념을 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중략) 존재와 사물의 불합리성을 합리적으로 고려하는 역사방법론이 특히 모든 반발과 분열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존중하고, 어떠한 신성성을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과거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 혁명의 ‘순간들’을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중략) 이 책의 목적은 혁명의 전체 ‘기간’(메스트르가 말한 ‘시대epoque’) 속에 이 ‘순간들’을 등록하고, 개인과 집단의 관계를 지배하는 미세한 장치들까지 고려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절대군주정이 개혁을 실시하면서 시작하고, 귀족과 고등법원 인사들의 반대 운동으로 연장되고, 결국 ‘민중’의 봉기로 완성하는 혁명의 실험 과정과 함께 군사국가가 탄생했다가 자유주의 국가로 바뀌고, 마침내 마력(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중심의 국가를 조직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중략) 프랑스의 가장 결정적인 시기의 역사를 쓰려면 종합적 분석과 미리 나눈 범주에 맞춰 설명하는 방식을 비판하고, 평범한 개인들이 집단이 될 때 맡는 역할과 함께 주도적 행위를 고려해야 한다. 이 경우 사실의 미로를 헤쳐 나가고 언제나 공백이 있게 마련인 문서를 끊임없이 뒤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_ 「머리말」 중에서 ◆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의 위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18세기에 ‘혁명’은 프랑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명예혁명으로 유명한 영국을 비롯해 제네바, 폴란드, 스웨덴, 특히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일어난 일련의 ‘대서양 혁명’이 있었다. 그러나 절대주의 체제인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왕과 왕비가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은 역사의 엄청난 분기점이자 충격이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1789~1799년을 휩쓴 프랑스의 사회변화만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대서양 혁명이 ‘부드러운’ 혁명이자 계몽주의 시대에 잇달아 일어나 국내 문제와 신분이나 시민 공동체의 긴장을 해결하는 ‘혁명들’에 속하고 대부분 실패한 데 비해 프랑스 혁명은 1789년까지 일어난 이런 방식의 혁명들과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일어난 ‘혁명’이었으며, 민중 세력이 사회지도층 세력만큼 중요했고 명사들의 지도체제를 설립하는 것과 다른 정치적 해법을 요구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많은 사람이 흔히 오해하는 사실 중 가장 중요한 지점은 혁명은 새로운 것이고 구체제는 낡은 것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프랑스 혁명이 구체제의 위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저자는 “혁명의 문턱을 넘었다는 집단의식은 분명히 1789년부터 생겼지만, 프랑스 절대군주정의 구조가 허약하고 결국 무너지리라는 생각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1789년에는 절대군주정의 질서 파괴보다는 이미 죽음의 문턱에 선 체제의 잔재에 붙인 이름이 관건이었다. 앙시앵레짐의 절대주의는 이미 1760~1770년부터 몰락하고 있던 건물을 가리는 벽면이었을 뿐이다”(71쪽), “혁명이 전혀 새로운 의미를 발명하고, 그렇게 해서 나라를 불행한 모험에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서 혁명의 ‘새로움’과 구체제의 ‘낡음’을 대립시켜서는 안 된다”(154쪽)라고 단호하게 지적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정부가 세 가지 정책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까 망설이던 순간이 바로 혁명사의 실마리였다. 조세제도가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될 세 가지 정책 가운데 첫째는 프랑스가 부채상환 방법을 토의할 수 있는 입헌군주국으로 남을 것인가, 둘째는 전문직이 참여하는 정부를 운영하면서 난폭할 정도의 세금을 부과하는 절대주의 국가가 될 것인가, 셋째는 전통 귀족이 왕과 백성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는 ‘혼합형mixte’ 군주정이 될 것인가? 어떤 경우에도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의 위기’ 때문이 아니라 일련의 상황들이 결합해서 생겼다. (105~106쪽) ◆ 프랑스 혁명은 미리 계획한 개혁이 아니라 타협과 우발적 사건의 산물이다 30여 년간 프랑스 혁명사를 연구해온 저자는 ‘혁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888쪽이나 되는 이 방대한 책에서 저자가 ‘혁명’ 자체에 대해 언급한 부문만 간단히 추려서 살펴보자. 혁명은 영원히 채우지 못할 기대와 실패의 불안을 조성하면서 수많은 경험을 끊임없이 창조하고 확인해주는 과정이다. (17쪽) 혁명이란 멋대로 날뛰거나 궤도를 벗어난 기계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쇄신하고 기초부터 다시 놓는 과정과 배제하고 탄압하는 과정이 나선형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 (18쪽) [사실상] 왕의 ‘나약함mollesse’ 때문에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루이 14세나 보나파르트처럼 강한 성격이었다면 혁명을 막았을 것이다. (70쪽) 혁명은 집단이 체제와 국가가 인류 역사와 맺은 관계를 끊는다는 의식을 갖출 때 일어난다. (95쪽) 혁명은 전혀 한 덩어리bloc인 적이 없었고, 전체적으로 함께 작용하지만 서로 대립하던 흐름들의 영향을 받아 움직인 집단들이 관리한 충격에서 나온 것. (492쪽) 국가를 중앙집권화하고 급격히 정치화한 것은 혁명이 아니라, 그 반대로 수많은 의견을 가진 개인들이 몰려들어 개입한 결과였다. (500쪽) 이처럼 저자는 ‘혁명’의 뜻을 예단하지 않고 평가해야 하며, 당시 여론이 국내외적 상황과 함께 ‘혁명’을 어떤 맥락에 접목시켜 언급했는지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1789년, 프랑스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인 것은 재생이었다.”(246쪽) 결론적으로 프랑스는 고질적인 재정적자와 세금문제, 종교 갈등, 극심한 빈부격차에 따른 민중의 불만이 누적된 결과, 1789년 이전에 이미 혁명을 겪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그 근거로 농촌과 도시에서 30여 년 동안 반란과 봉기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을 꼽는다. “이념적으로 야릇한 지름길을 부추기는 요약에 의존하는” 전체사적 해석을 경계하면서 “역사를 쓸 때 그 어느 때보다 정치철학의 체계적 분석에 솔깃해져 굴복하는 일을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저자는 “프랑스 혁명은 미리 계획한 개혁이 아니라 타협과 우발적 사건이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왕국의 헌법을 요구한다고 분명히 말하지 못한 상황이 진짜 혁명적인 목표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241쪽)고 지적한다. 그리고 “우리는 혁명기를 종교전쟁기부터 온갖 갈등을 극복하면서 근대국가를 발명하고 절대군주정을 세우는 과정의 끝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99쪽)라고 결론짓는다. ◆ ‘계몽주의’를 ‘구체제’와 대립시키는 것은 역사적 신화 만들기다 프랑스 혁명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계몽주의다. 그중에서도 볼테르와 루소의 비중이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다(1791년에는 볼테르가, 1794년에는 루소가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특히 루소의 ‘일반의지’라는 명제는 국회의 좌파와 우파 모두가 받아들인 개념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다고 해서 계몽주의가 혁명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기존 관념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계몽주의와 혁명의 관계를 둘러싸고 지난 2세기 동안 연구자들이 그릇된 토론에 힘을 쏟았다고 일침을 가한다. 저자는 기존 연구들이 가진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짚어준다. 계몽주의의 마지막 대표들이 1790년 이후 비판의 대상이 되고, 더욱이 국회에서도 조심스럽게 침묵하고 숨어야 했던 현실은 좀처럼 고려하지 않았다. 1791년에 볼테르와 1794년에 루소를 장엄하게 팡테옹Pantheon에 안장했다고 해서 불화가 존재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의 다양한 현실을 이해하려면 계몽사상가와 프리메이슨이 프랑스 사회를 파탄 냈다고 비난하는 반혁명가들은 물론 생쥐스트Saint-Just처럼 18세기 전체를 팡테옹에 안장해야 한다는 혁명가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여러 가지 맥락에 있으면서도 마르크스처럼 계몽주의를 봉건주의와 싸우는 부르주아 계층의 도약과 연결하거나, 카시러Cassirer처럼 계몽주의란 이성을 해방자로 믿는 행위로 보거나, 아도르노Adorno와 호르크하이머Horkheimer, 아렌트Arendt처럼 계몽주의란 모든 사회의 인간적 요소를 제거하고 전체주의의 기초를 놓는 데까지 현실세계를 지배하려는 욕망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사상가들과도 멀리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모두 자극적이긴 해도 똑같은 결점을 가졌다. 불평등하고 모순투성이며 나라마다 다른 특성을 가진 운동을 포괄하고 단일화하려는 의도. (중략) 계몽주의가 프랑스 혁명에 책임이 있으며, 그 자체의 야망도 파괴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비난은 19세기에 수많은 현실을 혼합해서 나온 결과다. (중략) ‘계몽주의’를 ‘구체제’와 대립시키는 것은 역사적 신화 만들기다. (134~135쪽) ◆ 테르미도르 정변과 ‘위대한 혁명가’ 로베스피에르 이 책에서 저자는 크게 대서양 혁명기부터 나폴레옹이 제1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집정관정부의 총재로 권력을 장악한 시기까지를 다루는데, 프랑스 혁명기 자체는 1789~1799년까지의 10년을 중심으로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눌 수 있다. 그중 후반기는 혁명을 부인하는 시기였으며, 이 시기를 전후해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이 바로 ‘공포정’의 화신으로 알려진 로베스피에르다. 1794년 7월 27일, 혁명정부를 이끌던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었다. 그 사건은 ‘테르미도르 정변’이라고 불리며, 사실상 ‘반동’에 해당한다. 이렇게 혁명기 전반기가 막을 내렸는데, 저자에 따르면 “테르미도르는 사건이자 개념”이다. 저자는 ‘공포정’이라는 개념은 “테르미도르 반동파가 발명”한 것이며, “1793~1794년까지 정부의 어떤 위원회도 명시적으로 이러한 체제를 말하고 수립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지역사회의 수호, 신속한 법적 처벌, 정치적 폭력의 관행들이 1789년 이전의 군주정 시기에도 있었음을 다시 짚고 넘어가자”(404쪽)고 강조한다. 저자는 불철주야 혁명에 매진하던 로베스피에르가 동지들의 배반으로 목숨을 잃고 ‘단두대의 역겨움’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든 ‘공포정’의 주역이자 독재자라는 오명을 혼자 뒤집어쓴 것에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혁명이 과도한 공포정을 실시했고 그것을 로베스피에르의 책임이라고 비난하기 위해 이용되었기 때문에 처형자의 수가 알려진 것은 아닐까?”(651쪽), “푸키에 탱빌Fouquier-Tinville과 안보위원회가 일부러 법 집행을 마구잡이로 했기 때문에 ‘단두대의 역겨움’은 프레리알 법의 책임이 되었다. 이에 따라 로베스피에르는 쉽사리 변명할 여지도 없이 그 책임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로베스피에르는 바둑을 둘 때처럼 달리 행동할 방법을 찾지 못해서 덫에 걸리고 말았다. 망명자들은 출판물에서 그의 ‘독재’를 언급했다. (중략) 구국위원회 동료들뿐 아니라 안보위원회와도 불화를 겪었다. 특히 그는 ‘내부의 적’을 직접 위협했기 때문에 고립을 자초했다. 여론도 그를 외면했다.”(652쪽) 그러나 후세에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의 화신으로 재조명되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우리는 로베스피에르가 후세의 마음을 얻은 것이 (퓌레F. Furet의 말처럼) “그가 혁명의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순수한 이야기를 대변”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이 분야에서 분명히 미라보를 이겼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에게는 좀 더 신경질적이며, 정부의 타협을 모두 거부하면서 혁명에 전념한 마라라는 경쟁자가 있었다. 로베스피에르가 혁명의 화신이 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바레르나 비요 바렌처럼] 어제의 동지가 영원한 적이 되어 ‘공포정’으로 불린 정치적 폭력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고 오직 그만이 책임지도록 했으며, 무슨 일을 벌이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하고 출구도 없는 방향으로 혁명을 난폭하게 몰아갔기 때문이다. 그의 신화는 이상하게도 그의 명성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그를 사형집행인으로 기억한 방데의 신화가 뒤섞이는 과정을 거쳐서 태어났다. (662쪽) ◆ 나폴레옹에게 몰수당한 혁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프랑스 사람일 것이다. 파란만장한 인생사와 신화의 주인공이자 프랑스 혁명에 종지부를 찍고 1804년에 스스로 ‘황제’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인 만큼 비범하고 매력적인 면이 분명히 있다는 점을 저자도 인정한다. 그러나 냉정하고 객관적인 서술을 중시하는 역사가의 입장에서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외국 원정을 통해 국고를 채우고 영토를 확장한 나폴레옹의 ‘성공 신화’ 중에서 추잡하거나 하찮게 비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보나파르트의 신화를 깨뜨리고 싶지만, 그가 당시에 성공한 이유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보나파르트는 (중략) 이탈리아를 통제하고, 유럽을 재편하고, 프랑스 국민의 삶에 개입하려는 전략을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수립했다. 바라스 같은 총재들은 레오벤에서 예비협상을 할 때 많은 돈을 받았는데, 보나파르트는 그들이 돈을 밝힌다는 사실을 이용할 줄 알았다. (중략) 보나파르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공포정책을 체계적으로 활용했다. 1797년 4월 17일 베로나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추잡하게도 보나파르트는 주민과 군대의 적대감을 이용해서 베네치아 공화국을 점령했다. (763~764쪽) 이탈리아 원정은 보나파르트를 말 그대로 국가 정치생활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의 무공은 능숙한 선전을 통해 프랑스에 세심하게 전달되었고, (중략) 이탈리아 원정은 비록 제한되고 미미한 결과를 낳았음에도 지중해와 보나파르트를 중심으로 프랑스 정치의 균형을 흔들었을 뿐 아니라 전쟁의 목표와 방법, 프랑스인과 권력자들의 관계, 그리고 정치적 의미를 바꾸어놓았다. (766쪽) 저자는 이탈리아 원정에 관한 선전이 나폴레옹의 전설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전환점이 되었지만, 거물급 인사들이 살롱에 모여 계속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에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아직 서른 살도 안 된 때 총재가 되고 싶어 헌법에 명시된 마흔 살 이상의 조항을 무시하면서 바라스와 탈리엥에게 지원을 요구하고 결국 술책의 달인 탈레랑의 지지를 받은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가 야망이 크고 정치적 정력이 유별났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혁명이 몹시 급격하게 근대성을 도입한 탓에 국가와 프랑스인 사이에는 괴리감이 존재했는데, 보나파르트는 이에 “강압과 유혹으로 대응했다. 브뤼메르 정변으로 태어난 국가의 성격이 모호했기 때문에 제국으로, 보나파르트 중심주의로, 한마디로 전례 없는 정치문화로 나아가는 새로운 전망이 열렸다”(836쪽)고 설명한다. 끝으로 저자는 나폴레옹이 자신의 원칙을 담은 근대적 헌법을 만든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가 일으킨 1799년 11월 9일(브뤼메르 18일)의 무장정변은 “단검으로 무장한 모의자들에게 거둔 하찮은 승리”였으며, “역사를 침묵시켜 혁명의 추억에 재갈을 물리고 역사가들을 통제한다는 사실을 예고했다”(841쪽)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200년도 훨씬 더 지난 과거의 역사적 대사건에 우리가 여전히 관심을 갖고 계속 더 깊은 연구를 해나가야 하는 이유는 저자의 말처럼 “오늘날의 지적 발전과 정치적 토론에 참여하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사를 써나가는 주체인 개인과 집단의 관계와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더없이 좋은 주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 : 마르탱, 장 클레망 , 출판사 : 여문책 , 입수일자 : 2024.12.03 ]]>
마르탱, 장 클레망 2024-12-03
<![CDATA[스크린 너머의 공간 이야기 :재미있게 풀어 보는 미디어 지리학]]> 장윤정, 2024-12-13 <![CDATA[역사학, 사회과학을 품다 :새로운 연구 방법론으로서 자연 실험]]>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애증 한때 역사학이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다. 사회과학이 전성기를 누릴 때였다. 사회과학 방법론이 역사학에 도입되면서 전통적인 역사학은 위기를 맞았고, 결국 역사학은 광범위한 변신을 통해 또 한때는 인문사회과학의 왕좌에 오르기도 했다. 이제 인문사회과학 모두가 몰락의 위기를 맞았다. 그것은 아마도 ‘엄밀(?)과학’이라는 자연과학의 득세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대개 과학적 방법의 보증서로 여겨지는 실험실 실험은 실험자가 직접 변수를 조작하고 통제하며 재현 가능하게 한다. 사실상 이는 물리학과 분자생물학 실험실에 적용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접근 방식은 원인과 결과, 효과의 연쇄를 확정하는 데 대단히 강력한 방법이다. 하지만 조작 가능한 실험이 널리 과학으로 받아들여지는 여러 영역에서도 불가능한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그것은 진화생물학, 고생물학, 역학(유향병학), 역사지질학과 천문학 등 과거를 다루는 과학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역사학과 일반 사회과학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실 역사학은 과거를 가장 오래 다루어온 학문이다. 따라서 과거를 다루는 과학이라고 받아들여지는 분야뿐 아니라 과거를 다루고자 하는 사회과학들도 역사학적 방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유용하다. 달리 말해 과학과 사회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연구자들은 ‘과학을 하는’ 다른 방안을 고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실재 세계를 관찰하거나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것과 개별적인 설명을 더 큰 틀에 놓는 것 등과 같은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다면 역사 연구에서 사용된 방법들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역사 관련 분야에서 종종 효과적이라고 입증된 기술이 자연 실험 혹은 비교 연구이다. 이런 접근 방식은 여러 측면에서 유사하지만 연구하고자 하는 것에 영향을 주는 요소와 상이해 보이는 서로 다른 시스템을 비교―통계적 분석〔1979년에 이미 역사학자 로렌스 스톤(Lawrence Stone)은 정량화 역할에 관해 논하면서 이와 같은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역사가들은 논리적으로 수적인 비교를 함의하고 있는 ‘더 많은’ 혹은 ‘더 적은’, ‘증가하는’, ‘감소하는’ 같은 서술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통계적 기초에 대한 언급 없이는 더 이상 할 수 없다.” / 특히 역사 연구에서는 물론 그것이 사회사로 수렴될 수밖에는 없지만 인구사, 도시사, 경제사 등에서 비교 연구와 정량적 방법을 많이 사용했다. 심지어 심성사 연구 등에서도 이러한 방법을 많이 채택하여 역사 연구의 영역을 확장한 사실은 누구나 인지하는 바이다〕의 도움을 받아 대개 양적으로―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전염병학은 사실상 인간의 번식에 관한 이와 같은 자연 실험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우리는 인간의 어떤 혈액형 그룹이 천연두에 저항력이 있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 는 우리가 상이한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에게 천연두 바이러스나 바이러스를 제거한 대조액을 주입하는 조작적 실험을 함으로써 알게 된 게 아니라 수십 년 전 인도에서 마지막으로 자연 발생한 천연두가 유행하는 동안 상이한 혈액형을 지닌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알게 된 것이다. 전염병이 발생한 시기에 외진 마을에 있던 의사들이 그 마을 사람들을 혈액형에 따라 그룹으로 나누고 이들 중 누가 병에 걸리거나 죽고 혹은 걸리지 않는지를 관찰했던 것이다. 물론 자연 실험에는 ‘실험자’가 측정해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한 다른 요소에 영향을 받은 결과가 나타날 위험도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분명한 함정도 존재한다. 어쨌든 인간 사회를 다루는 다양한 사회과학은 자연 실험을 균등하지는 않지만 생각보다는 다양하게 사용해왔다. 고고학, 문화인류학, 발달심리학, 경제학, 경제사, 정치학, 사회학 등에서 자연 실험은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따라서 이 책은 역사에서의 비교 방법을 소개하고 7장에 걸쳐 8개의 연구 사례(4장에 2개의 연구 사례가 들어 있다)를 보여줌으로써 이 방법에 깃든 명백한 함정을 피해갈 수 있는 몇 가지 기술을 검토하고 있다. 이 책에서 편저자들이 목표로 삼은 주요 독자에는 비교 방법을 수용하는 (혹은 적어도 화해하지 못할 정도로 반대하지는 않는) 역사가뿐만 아니라 이미 광범위하게 비교 방법을 도입하고 있는 관련 사회과학계의 다수 학자들도 포함된다. 따라서 필자들은 자기 분야에서 성취를 이룬 학자뿐만 아니라 학부생을 대상으로 이 책을 썼다. 8개의 사례 연구는 7명의 저자가 썼는데, 그중 2명은 역사학과에 속한 전통 역사가이고 다른 이들은 고고학, 경영학, 경제학, 경제사, 지리학, 정치학 전문가 중에서 뽑았다. 아울러 이 연구는 4가지 관점에서 비교사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을 포괄하도록 기획되었다. 첫째, 접근법에는 역사가에게 전통적인 비정량적 서술 유형부터 역사학 이외의 사회과학에 잘 알려져 있는 통계 분석을 이용한 정량적 연구까지 포함하도록 했다. 둘째, 우리가 수행한 비교는 단순한 두 갈래 비교〔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섬을 공동 소유하고 있는 도미니카공화국과 아이티〕부터 두 장에 걸쳐 서술한 세 갈래 비교 그리고 수십 개의 독일 지역 비교에서 81개의 태평양 섬 비교, 233개의 인도 지역 비교까지 다양하다. 셋째, 우리가 연구한 사회는 오늘날 충분한 기록 문헌 정보를 갖추고 있는 최근 세기의 문자 사회는 물론 모든 정보를 고고학적 출토품에서 얻을 수밖에 없는 문자 이전 사회까지 포괄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연구는 지리적으로 다양한 지역을 포괄하고 있어 역사가들에게 세계의 수많은 상이한 지역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사례연구는 미국, 멕시코, 카리브 해의 섬, 브라질, 아르헨티나, 서유럽, 열대 아프리카, 인도, 시베리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그리고 그 밖에 다른 태평양 섬들을 포괄한다. 전통적인 역사가들은 이 책에 등장하는 첫 4개의 연구에서 택하고 있는 접근 방법이 친숙하다고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연구에서는 서술 유형으로 증거를 밝히며 소수의 사회(각각 3곳, 7곳, 3곳, 2곳)를 비교하되 텍스트에서 정량 데이터를 통계적으로 비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머지 4개의 연구가 택하고 있는 접근 방법은 전통 역사가들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몇몇 역사가 및 관련 사회과학자에게는 친숙할 것이다. 요컨대 이연구는 전적으로 정량 데이터의 통계적 분석에 기초하고 있으며 다수의 사회(각각 81곳, 52곳, 233곳, 29곳)를 비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역사 연구에서 양적 데이터와 측정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고, 인간의 역사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 분야가 시야를 좁힌 사례 연구와 광범위한 종합 혹은 일반화 사이의 긴장을 경험한다. 따라서 이 책의 사례 연구들은 역사 연구에 관한 두 가지 종합적인 결론을 뒷받침해준다. 첫째 역사적 비교 연구는 그 자체로 모든 해답을 제공하지 않지만, 단일 사례 연구만으로는 도저히 추론할 수 없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19세기 후반의 프랑스가 19세기 후반의 독일, 혹은 16세기 후반의 프랑스와 왜 달랐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19세기 후반의 프랑스를 이해하길 기대할 수는 없다. 둘째, 가능한 한 어떤 결론을 제안할 때 양적인 증거를 모으고(혹은 적어도 결과를 ‘크다’에서 ‘작다’는 식으로 순위를 매김으로써) 결론의 유효성을 통계적으로 검증함으로써 그 결론을 강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학문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진 지금, 역사와 사회과학은 연구 방법에서도 사실상 접근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 실려 있는 다양한 사례들이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건을 오랫동안 연구한 사람들은 일종의 이점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한 사건을 새롭게 들여다보고 여기에 다른 사건을 연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험과 통찰력을 더하면, 또 다른 종류의 이 점을 얻을 수 있다. 그러기에 역사 연구 방법의 역사도 존재하는 것이며, 거기로부터 나온 다양한 연구 방법론은 역사 연구를 아주 풍부하게 만들었다. 이 책도 이러한 역사 연구의 역사 속에 포함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역사학자와 사회과학자에게 하나의 유용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저자 : 넌, 네이넌, , 출판사 : 에코리브르 , 입수일자 : 2024.11.29 ]]>
넌, 네이넌, 2024-11-29
<![CDATA[영역 :짧은 지리학 개론 시리즈]]> 이 짧은 개론서는 ‘영역’이라는 복잡한 용어를 이해하기 쉽게 소개함으로써 영역에 대한 다양한 연구경향들을 다학제적인 방식으로 탐구한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영역적 구조에 대한 해석, 영역과 스케일 간의 관계, 영역의 타당성과 유동성, 영역재편과 관련된 실질적 사회과정 등과 같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데이비드 딜레니David Delaney에 따르면 우리가 영역을 이해하는 방식은 정치권력, 경제권력, 문화권력 등의 권력을 이해하는 방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런 입장에 따라 그는 영역을 이해하는 다양한 관점들을 개괄한다. 그는 또한 로버트 색Robert Sack의 고전인 『Human Territoriality: Its Theory and History』를 꼼꼼하면서도 비판적인 방식으로 독해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맥락에서 영역성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탐구함으로써 딜레니의 논의에 대한 다양한 예시를 제공한다. “이 책은 영역이라는 사회공간의 핵심적 요소의 다양한 차원을 이해하기 쉽게 훑어보는 매우 뛰어난 저작이다. 딜레니는 자극적인 예시들과 자세한 사례연구들, 그리고 독창적인 이론적 종합을 한데 엮어서, 영역이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구조화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추적한다. 딜레니의 명쾌한 글쓰기 방식과 여러 분과학문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전문성 덕분에 이 책은 모든 수준의 학생들에게 매우 유용한 자원이 될 것이다.”- 닐 브레너Neil Brenner, 뉴욕대학교
저자 : Delaney, David , 출판사 : 시그마프레스 , 입수일자 : 2024.12.13 ]]>
Delaney, David 2024-12-13
<![CDATA[황제의 말과 글 :조선을 대하는 명나라 황제의 두 얼굴]]> 저자 : 정동훈, , 출판사 : 푸른역사 , 입수일자 : 2024.12.09 ]]> 정동훈, 2024-12-09 <![CDATA[흉노 유목제국사 :기원전 209~216]]> 몽골 초원의 첫 유목제국 흉노의 역사를 복원하다 위구르, 돌궐에 이은 고대 유목제국사 3부작의 완성 국내의 대표적 중앙아시아사 연구자인 정재훈 교수는 2005년 박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위구르 유목제국사』를 출간하고, 2016년 『돌궐 유목제국사』를 출간한 데 이어 2023년 『흉노 유목제국사』를 출간하며 고대 유목제국사 3부작을 완성했다. 20년 가까이 이어온 이 여정은 고대 유목제국사를 총정리 하는 작업이자, 기원전 3세기 중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 북아시아를 중심으로 전개된 역사를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정 교수는 이 3부작을 통해 유목제국의 세계사적 위상과 의미를 환기해 그들이 활약했던 무대인 ‘초원’을 정주 세계와 동등한 하나의 역사 단위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기원전 3세기 중반, 유목 기마궁사 ‘호胡’의 하나로 등장해 국가를 세우고 중국의 여러 나라와 대결하며 성장한 흉노는 이후의 유목 국가들에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는 ‘원상原象’의 역할을 했다. 400년 넘게 세력을 과시하며 정주 세계를 위협한 만큼 역사가들에게 문명의 파괴자, 야만의 통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흉노 이후 등장한 유목 세력들은 한의 멸망 이후 북중국에서 전개된 분열과 혼란의 책임을 뒤집어쓰거나, ‘호胡’와 ‘한漢’의 융합을 통해 수당제국이 성립하는 과도기를 연 집단 정도로 해석되기도 했다. 정 교수는 문명과 야만의 대립, 혹은 통일제국으로 가는 과도기로서 유목 국가를 바라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초원과 북중국을 하나로 연결된 세계로 이해하며 그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체제를 처음 만든 흉노의 역사적 위상을 재정립하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중국과 그 바깥 세계를 가르는 상징처럼 인식되어온 ‘장성長城’을 “세력의 부침과 이해관계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해체도 되고 유지도 되는 가변적인 것”(114쪽), “꽉 막힌 벽체가 아니라 구멍이 있는 탄력적 상태”(272쪽)로 새롭게 해석한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흉노의 활동과 영향 범위는 유라시아 대륙 전반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그 ‘후계’를 주장하는 나라들에서 흉노의 역사를 자국과 연결하려는 시도가 많다. 고대 소수민족의 하나였던 흉노가 중화민족의 일원이 되었다고 해석하는 중국을 비롯해 몽골공화국과 중앙아시아 투르크 계통의 국가들에서도 흉노를 자국의 고대사와 연결하는 작업이 활발하고, 한국에서도 초원 문화와 우리 고대 문화의 친연성을 확인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흉노의 연원을 설명하는 일은 곧 첨예한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다. 이 책은 역사 연구자의 엄격한 시각에서 문헌 자료와 발굴 자료에 입각해 흉노의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으로,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흉노의 ‘진상眞相’에 다가가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문헌 연구자의 시각으로 새롭게 접근한 흉노 유목제국 통사 - 『사기』 「흉노열전」 모두 부분의 재해석 초기의 흉노사 연구는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 등 중국 측이 남긴 한문 사료를 연대별로 정리해 역주하는 작업이 주를 이루었다. 흉노 스스로 남긴 기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자료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1924년 노용 올 유적 발굴 이후 100년에 걸친 발굴 성과가 축적되면서 발굴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가 중심이 되었고, 상대적으로 사료는 중국 측의 편견이 담긴 서술일 수밖에 없다는 등의 이유로 덜 주목받게 되었다. 정재훈 교수는 고고학 발굴 작업의 성과를 환영하면서도 그 한계를 지적한다. 발굴 작업이 활발한 몽골공화국의 막북 초원 위주로 자료가 편중되다 보니 막북이 흉노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된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정도로 연구 시기가 한정되고, 기록이 많은 막남 중심의 초기 역사에 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는 것이다. 더욱이 발굴 자료만으로 400년 넘게 지속된 흉노사 전반을 설명하려는 것도 문제라고 말한다. 발굴 위주의 연구는 물질 자료에 기초한 까닭에 ‘문화文化’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고고학 연구에서 기록에 나오는 ‘정치적 실체’인 흉노와 그 문화를 바로 연결하려는 입장이다. 하지만 문화는 정치적 단위인 흉노의 건국부터 소멸까지의 시간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또한 정치체의 공간적 범위와도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따라서 하나의 정치체인 흉노의 문화적 양상이나 특징을 발굴 자료와 바로 연결해 설명하는 일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 26쪽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정 교수는 문헌 연구자로서 사료에 깃든 편견을 걷어내고, 발굴 자료와 문헌 기록의 불일치를 극복하면서 기존의 문헌 자료를 ‘흉노 나름의 시각’에 맞춰 새롭게 해석하는 일을 이 책의 과제로 삼았다. 흉노 관련 가장 중요한 기록인 사마천의 『사기』 「흉노열전」에서 흉노의 선조와 유목 습속을 다룬 모두冒頭 부분을 기존의 표점을 옮겨 새롭게 해석한 것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匈奴, 其先祖夏后氏之苗裔也, 曰淳維. 唐虞以上有山戎ㆍ??ㆍ?粥, 居于北蠻, (2) 隨畜牧而轉移. (1) 其畜之所多則馬ㆍ牛ㆍ羊, 其奇畜則?駝ㆍ驢ㆍ?ㆍ??ㆍ??ㆍ??. 逐水草遷徙, 毋城郭常處耕田之業, 然亦各有分地. (1)에서 끊어 읽는 기존의 해석 흉노는 그의 선조가 하후씨의 먼 자손으로 순유라고 한다. 당[요]과 우[순] 이전에 산융·험윤·훈육이 있어 북쪽 족속[의 땅]에 살며 길들인 짐승을 풀어 먹이며 따라다니는데 [계절에 따라 일정한 곳을] 맴돌며 옮겨 다녔다. 길들인 짐승의 많은 수는 말·소·양이고, 쉽게 보기 어려운 길들인 짐승은 낙타·나귀·노새·버새·뛰어난 말·무늬가 있는 말이다.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며 살아 성곽, 붙박여 사는 곳, 농사를 짓는 땅에서 먹고 사는 것이 없지만 각자 나누어 가진 땅이 있다. (2)에서 끊어 읽는 정재훈 교수의 해석 흉노는 그의 선조가 하후씨의 먼 자손으로 순유라고 한다. 당[요]과 우[순] 이전부터 산융·험윤·훈육이 있었는데 북쪽 족속[의 땅]에 살았다. [흉노는] 길들인 짐승을 풀어 먹이며 따라다니는데 [계절에 따라 일정한 곳을] 맴돌며 옮겨 다닌다. 길들인 짐승의 많은 수는 말·소·양이고, 쉽게 보기 어려운 길들인 짐승은 낙타·나귀·노새·버새·뛰어난 말·무늬가 있는 말이다.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며 살아 성곽, 붙박여 사는 곳, 농사를 짓는 땅에서 먹고 사는 것이 없지만 각자 나누어 가진 땅이 있다. 정재훈 교수는 중화서국 표점교감본에 따른 기존의 해석은 요순시대부터 북쪽에 살던 족속이 유목 생활을 했다는 서술이 되어 실제 정황과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순유가 북쪽으로 간 상 말기에 중원 사람들이 접촉했던 ‘다른 존재’는 유목민이 아니라, 도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비농경민 혹은 반목반농에 종사하던 집단이었다. 당시 유목은 아직 일반적인 생산 양식이 아니었고, 초원의 유목민과 중원 세력이 교섭을 시작한 것은 훨씬 후대, 즉 전국시대 영역국가가 발전할 무렵의 일이었다. 지금껏 많은 역사가들이 유목의 발생 시기나 초원과 중원이 접촉을 시작한 시점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북방=초원=유목’이라는 도식에 맞춰 이 부분을 해석해왔다는 것이 정 교수의 주장이다. 정 교수는 표점을 옮겨 (2) 부분에서 끊어 읽는다면 앞 문장은 흉노의 선조와 원류만을 간단히 기록한 것이 되고, ‘隨畜牧而轉移’ 이하의 내용은 유목 습속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된다고 본다. 특히 ‘맴돌며 옮겨 다니다’라는 뜻의 ‘轉移(전이)’는 사마천이 유목을 정확히 이해하고 묘사한 표현인데, 반고의 『한서』 이래로 많은 역사가들이 기존의 표점을 따라 ‘逐水草遷徙’의 ‘遷徙(천사)’, 즉 ‘옮겨 다니다’를 유목의 정의로 사용하면서 흉노를 비롯한 유목민들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존재로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정 교수는 이 예를 통해 그동안 한계가 많다고 지적되어온 사마천의 『사기』 「흉노열전」이 유목민에 대한 관념적이고 부정적인 인식으로 퇴보한 후대의 기록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객관적인 현실 인식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마천은 흉노 제압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은 무제가 간신들의 꾐에 넘어가지 않고 정확한 상황 판단을 하기를 바랐다. 이를 돕기 위해 ‘현재사現在史’로서 흉노의 독자적인 체제와 강력한 힘을 ‘직필直筆’하겠다는 사명감 속에서 기록을 남겼다. 이와 같은 사마천의 저술 구상을 확인하고, 『사기』와 그 영향하에서 저술된 후대의 사료들을 엄밀히 비교 분석하여 흉노의 ‘진상’을 재구성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라 하겠다. ‘비한非漢’ 세계의 다원성을 품은 유목 기마궁사의 나라, 흉노 화친, 전쟁, 교역, 기미 등 다양한 공존 방식을 개척한 유목제국의 원상 기원전 209년 고비 사막 이남의 몽골 초원(막남)에서 세력을 형성한 흉노는 장성 주변의 목축민 융을 통합하고 진, 조, 연과 같은 중국 북변의 국가들, 나아가 통일제국 한을 위협하며 ‘인궁지민引弓之民(유목 기마궁사)’의 나라 ‘인궁지국引弓之國’을 세웠다. 건국 이후 흉노는 한에 대한 군사적 도발을 지속하며 다른 한편으로 계속해서 ‘화친和親’을 요구했다. 이는 자체 생산력에 한계가 있는 유목 국가가 정주 국가로부터 물자 지원을 받아내 체제를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의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북방의 중가리아와 톈산산맥 주변, 즉 이른바 ‘서역西域’에 진출하여 오아시스 지역 국가들의 공납을 받거나 중국에서 얻은 물자를 교역하며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도모했다. 이를 저지하려는 한의 서방 진출로 이후 ‘실크로드silk road’라고 불리는 동서 교통로가 열리기도 했다. 이와 같이 흉노가 열어젖힌 역사의 무대는 몽골 초원만이 아니라 이와 연결된 유라시아 동부 초원, 장성 남북에 펼쳐진 목농복합구역(잡거지), 그 서부에서 동서를 연결하는 오아시스와 그 주변 초원까지를 포함하는 넓은 범위였다. 216년 흉노가 소멸한 이후 그 일부가 중국 내지로 남하해 ‘병주 흉노’를 형성한 것까지 고려한다면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지리적 범위뿐만 아니라 흉노 내부의 구성원도 유목민, 목축민, 전쟁 중에 투항하거나 중국에 반기를 들고 이탈한 정주민, 오아시스 지역 주민까지 넓고 다양하게 펼쳐져 있었다. 따라서 ‘초원의 유목민’과 ‘중국의 정주민’의 대결 혹은 융합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더 넓은 범위의 ‘비한非漢’ 세계의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흉노사의 전개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 정 교수의 주장이다. 내부에 다양성과 복합성을 품은 흉노는 대선우大單于라는 유목 군주의 지도하에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중국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관계를 맺었다. 한 고조를 포위할 만큼 군사적 우위를 보인 초기에는 흉노 대선우와 한의 황제가 대등한 형제임을 확인하고, 혼인 관계를 맺는 등 화친을 통해 정기적인 물자 지원을 받았다. 그러는 가운데도 융의 원주지인 목농복합구역을 회복하고, 한을 위협해 물자를 얻어내기 위해 계속해서 군사적 도발을 했다. 한은 이를 방어하기 위해 장성을 수축하고 물자 지원에 제한을 두었다. 이후 한 무제의 강력한 북벌 정책이 실시되면서 기원전 119년 흉노는 막남 고지를 포기하고 막북으로 패퇴한다. 막북 초원에 고립된 상태에서 대선우의 계승 분쟁까지 일어나자, 분열한 세력 가운데 하나였던 호한야 대선우는 기원전 51년 이래로 장안을 세 번이나 방문해 한의 지원을 얻어냄으로써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흉노는 왕망의 집권과 몰락으로 중원이 혼란에 빠진 시기에 일시적으로 세력을 회복했다가, 48년 또 한 번의 계승 분쟁으로 남북 분열이라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남흉노의 호한야(비) 대선우는 한의 번병藩屛이 되겠다며 자발적 투항을 통해 막남 고지故地로 돌아왔다. 이는 기미羈?를 수용해 한에 종속되는 일이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원주지의 회복이기도 했다. 이후 한이 몰락하고 중국이 분열의 시기로 접어들면서 남흉노는 결국 조조에게 군사적으로 동원되며 분할 통치되다가 216년 완전히 소멸했다. 이와 같이 흉노는 정주 세계와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400년 넘게 세력을 유지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렇게 오랜 기간 초원과 북중국을 무대로 큰 존재감을 과시한 세력은 없었다. 이 과정에서 흉노가 시도한 화친, 전쟁, 교역, 기미 등의 방식은 이후에 등장한 유목 세력과 중국의 관계에서 더욱 발전, 확장된 형태로 나타났다. 정재훈 교수는 이 다원적이고 복합적인 구성의 ‘원상原象’으로서 흉노를 조명하며, ‘호’와 ‘한’의 대결과 융합이라는 관점을 넘어 ‘공존’에 초점을 두고 동아시아사를 새롭게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저자 : 정재훈, , 출판사 : 사계절(사계절출판사) , 입수일자 : 2024.12.09 ]]>
정재훈, 2024-12-09